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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종대왕 에피소드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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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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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교수의 난자취득 비밀이 일찍 밝혀진 건 차라리 다행
애국심 말하며 촛불시위니 뭐니 들썩이는 꼴은 부끄러울 따름

▣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칼럼니스트

세종대왕이 밤이 이슥하도록 영의정과 중전과 셋이 국사를 논의하던 중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한다.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마음에 간직한 비밀이나 소망을 한번 털어놓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밤이 지나면 그 일에 관해서는 서로 입을 다물자는 것이었다. 왕께서 재촉하자 영의정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나 솔직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사오나 지존의 자리, 그러니까 임금님의 자리에 한번 앉아보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다 하고 말끝을 흐렸다. 왕은 그럴 법한 일이다 말씀하시고 중전도 어서 말해보오 하셨다. 저는 아침마다 주렴 속에서 듣는 저 말단의 정구품 당상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듣기 좋더이다 했더니 왕이 그것도 그럴 법한 이야기요 했다. 이어 왕께서 나도 참 민망하긴 하나 누가 뭐래도 철마다 잊지 않고 귀한 물건을 보내주는 아랫녘 아무개 방백이 제일 이쁩디다 했다 한다.

셋 이상 모이면 비밀은 없어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중전마마도 젊은 남자를 좋아했다거나 세종대왕도 뇌물을 좋아했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것이다. 왕과 영의정, 중전이 새벽 닭이 울면 다 잊어버리자고 굳게 약속했지만 결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단둘의 비밀은 한쪽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소문이 돌았다면 당연히 상대방이 한 것인 줄 알 수 있지만 셋 이상이 간여한 일엔 비밀은 있을 수 없다.

문화방송의 〈PD수첩〉이 황우석 박사의 난자 취득에 문제를 제기한 것을 보면서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그러나 다행이라는 심정이 되었다. 황 박사의 연구 성과가 세계적 뉴스가 될 때마다 간간이 흘러나오던 의혹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연구 과정과 속도가 위태위태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줄기세포 연구가 동물 복제에서 인간 복제로까지 이어지는 일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와는 다른 과정상의 비밀스러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량의 난자가 필요한 일이니만큼 난자를 어떻게 구했을까라는 점은 과학자들이나 과학전문 기자들이 당연히 의문을 제기할 일이었다. 그까짓 난자라거나 이 일이 알려진 뒤 기꺼이 난자를 제공하겠다는 자원자가 몰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5월13일 황우석 박사가 세계 처음으로 탄생시킨 ‘광우병에 감염되지 않는 내성소’가 내성 확인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취재진의 모습이 대한항공 화물기 앞에 선 소의 눈에 비친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여러 사람이 간여한 일에 비밀이 있을 수 없다.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폭로될 수 있는 일이고 난자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언젠가 더 많이 돈을 주는 사람에게 폭로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한다. 또한 황 박사가 뉴스의 초점이 되면서 누군가 자랑으로 아니면 비사로서 자신의 기여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으리라는 점을 왜 몰랐을까라는 안타까움이 크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것이 다른 나라 언론이 아니고 우리나라 언론에서 밝혀졌다는 데 대한 안도감과 자부심 때문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개 복제에 성공한 황 박사가 개집에 갇혔다든가 식의 비아냥 어린 외신 보도를 보면서 만약 일본이나 미국의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추적되고 보도됐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방송은 언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국익이나 애국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애국심·애사심·애향심·애교심은 상당히 비이성적이다. 사태의 본질을 때로 오도한다. 가족 가운데 하나가 국제적인 뉴스의 초점이 된 마당에 작은 허물이 있다면 그것을 남이 밝히기 전에 집안 식구가 먼저 알고 있었어야 한다. 그런 제보가 있고 그것이 곧 밝혀지게 생겼는데 쉬쉬하고 애국심으로 덮어둔다는 것은 일종의 공모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비밀스런 일을 비밀스레 전 국민이 단합해 벌이는 이상한 종교집단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PD수첩〉에 광고하는 기업까지 협박?

황우석 박사가 서울대 의대 출신이 아니고 수의대 출신이어서 무명 연구자 시절 알게 모르게 편견에 시달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어려움이 오늘의 황 박사를 있게 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다. 본인은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황 박사가 온 국민의 근심스럽지만 따뜻한 격려 속에 기자회견을 열 수 있었던 것과 신속하고 올바르게 처신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거액이 걸린 일이고 의료 지형과 기반을 바꾸는 일이다. 국내외적으로 주목의 대상이고 질시할 수 있는 연구이다. 그냥 과학만 앞서갈 것이 아니라 법적·윤리적 문제와 발표의 방법과 시기를 조정하는 문제들에 대해 전문가들이 검토할 수 있도록 스태프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어떤 연구도 비밀스럽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당장 노벨상을 놓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황 박사의 연구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그의 미래는 아직 길고 창창하다. 지금은 따뜻한 눈길로 보아주며 기다리고 참을 때다. 없는 일을 있다고 한 것이 아닌데 문화방송이나 〈PD수첩〉을 원망하고 〈PD수첩〉에 광고하는 기업까지 협박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익이나 황 박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황 박사의 난자 취득의 석연치 않았던 점이나 문화방송의 〈PD수첩〉보다는 애국심을 들먹이며 촛불시위니 뭐니 들썩이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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