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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인을 알아야 정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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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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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세상읽기]

‘지도자 추종주의’‘냄비 근성’등도 정치분석 담론에서 무게있게 활용돼야
노무현은 국민들의 ‘정치적 진보성, 경제적 보수성’의 실체 간파 못해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모든 책이 그 가치에 상응하는 주목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책은 과대평가되고 어떤 책은 과소평가된다. 평가할 가치가 있음에도 아예 평가의 대상에 오르지 못하는 책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매우 아쉽게 생각하는 책이 하나 있다. 한림대 김영명 교수가 지난 4월에 출간한 <신한국론: 단일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인간사랑)이다. 나는 이 책이 ‘한국적 사회과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정치학과 따로 노는 한국인 연구

노무현 정권의 최대 패착은 민심의 오독에서 비롯됐다. 노정권은 수구 기득권 세력에 대한 안티 정서를 개혁의 열망으로 해석했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한국적 사회과학’을 하자고 했더니 조선시대 연구로 돌아간 분들도 있었는데, 그것도 소중한 연구임엔 틀림없지만 ‘한국적’이라는 말에 너무 겁먹지 않으면 좋겠다. 최신 서양이론을 수입해 소개하더라도 그 이론이 한국 상황에선 어떤 장점과 한계가 있다는 것만 분명히 밝혀주어도 그게 바로 ‘한국적 사회과학’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학계는 한국적 사회과학에 매우 인색하다. 예컨대, 정치이론을 보자. 민주주의가 수입품이니 외국에서 이론을 수입해오는 수밖에 없다. 그건 당연하거니와 바람직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거나 매우 약하다. 한국 사회엔 어떤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은 어떤 한계를 갖는다거나 하는 추가 설명에 공을 들이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가 정치학과는 따로 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연구는 주로 이규태와 같은 언론인, 이어령과 같은 문학자, 그리고 재야학자들의 몫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일부 심리학자들이 그 연구에 뛰어들었지만, 정치학자들 중에 그런 연구를 한국 정치학과 접목시켜 대중화를 시도한 연구자는 드물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으로 거론되는 ‘소용돌이 문화’ ‘쏠림 현상’ ‘지도자 추종주의’ ‘냄비 근성’ ‘빨리빨리 문화’ 등이 한국 정치에 끼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일부 서양 정치학자들이 한국 정치를 바라보면서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특성은 한국 정치를 분석하는 담론에서 큰 무게를 갖지 못한다.

그로 인한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사태의 본질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준다. 연구자들조차 냉정한 분석보다는 자신의 희망으로 분석을 대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전 분석의 한계를 노정한 사태가 전개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또 분석으로 내놓는다. 사회 심층과 분리된 ‘명분과 당위의 대향연’이라고나 할까? 다수결주의에 의해 그런 대향연이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이런 낭만적 태도가 정치 불신과 혐오를 증폭시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한국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는 한국이 처한 두 가지 ‘조건’과 한국·한국인의 다섯 가지 ‘속성’을 지적했다. 두 가지 조건은 단일성과 밀집성이고, 다섯 가지 속성은 획일성, 집중성, 극단성, 조급성, 역동성이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하는 의미에서 그 내용은 소개하지 않겠다. 김 교수의 책이 갖는 의미는 한국 정치비평에서 정치권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정치권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라 할 한국·한국인 탐구도 병행해야 할 필요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역설했다는 점일 것이다.

‘대통령 없는 나라’에 대한 공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에서 살아온 국민 입장에선 '대통령이 없는 나라'는 견디기 어려운 공포였다. 탄핵 국면에서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제1의 법칙은 '안티의 법칙'이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지난 3·12 대통령 탄핵 사태로 돌아가보자. 나는 당시 나온 학자들의 분석보다는 한 택시기사의 분석이 더 정확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일보> 2004년 3월26일치 1면 머리기사로 오른 “박근혜 대표가 들은 ‘택시기사의 성난 민심’”은 한 개인택시 기사(58살)의 탄핵 정국에 대한 견해를 실었다. 박근혜 대표가 탄핵의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하자 택시기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잘 모르시나본데, 국민이 탄핵을 싫어해서 이 난리를 피우는 게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빚어낸 끔찍한 혼란을 못 견디는 겁니다. 촛불시위에 몇만 명 모인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 민심도 아니에요.”

대통령 없는 나라?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에서 살아온 국민 입장에선 당파성을 떠나 그건 견디기 어려운 공포였다. 공포는 분노를 낳았다. 그 공포와 분노는 시간이 흐르면서 좀 가라앉았지만 열린우리당을 제1당으로 만들어주는 파괴력을 발휘했다.

여기서도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제1의 법칙이 빛을 발했다. 그건 바로 ‘안티의 법칙’이다. 반감이 지배하는 정치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은 그걸 잘못 읽었다. 자신에 대한 지지로 해석했다. 노 대통령부터가 그런 착각의 원조였다. 그는 국민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건 자신에게 기대하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인간 노무현은 수구 기득권 세력에 대한 안티 정서를 잘 표현해준 유력한 상징이었을 뿐이다. 노 정권의 최대 패착은 민심의 오독에서 비롯되었다.

노 정권은 수구 기득권 세력에 대한 안티 정서를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했다. 무슨 개혁? 불행히도 그 개혁 의제는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의제였다. 관련이 있다면, 역사가 바로 서고 정치가 잘돼야 경제가 잘된다는 논리일 텐데, 그건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노 정권의 개혁 의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국민이 독재정권에 길들여졌거나 보수적이라는 혐의를 제기했다. 노 정권을 만들어준 사람들이 바로 그 국민이라는 반론이 나오자 노 정권 사람들은 무슨 심층 여론이 어떻고 표피 여론이 어떻다는 어려운 이론으로 대응했다. 지도자는 국민을 이끌 필요가 있다는 이론도 나왔다.

국민은 독재정권에 길들여졌거나 보수적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국민은 개혁을 외치는 노 정권 핵심 인사 1천 명보다는 덜 독재정권에 길들여졌고 덜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1천 명의 재산 상태를 보자. 이전 정권들의 인사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재산까지 갖춘 엘리트라는 사실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의 호구지책은 완벽하게 갖춰놓은 상태에서 개혁을 외치는 것이다. 반면 국민은 그렇지 못하다. 경기에 대단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민감성을 가리켜 독재정권에 길들여졌거나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적반하장이다.

한국인들의 경제적 보수성은 한국 경제의 본질이다. 해외 의존도가 70%가 넘고 늘 위태롭다. 사회복지는 형편없고 자녀교육은 살벌한 계급전쟁이다. 경제적 보수성은 생존권 차원의 문제다. 노 정권은 한국인 상당수가 갖고 있는 ‘정치적 진보성, 경제적 보수성’의 실체를 간파하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적 보수성은 일반적인 의미의 보수성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권의 개혁 의제 설정에 대한 평가에 국한해서 쓰는 용어일 뿐이다. 노 정권은 국정운영 의제 설정에서부터 실패한 것이다.

워컴의 ‘들쥐’ 발언은 망언이었을까

한국인의 독특한 지도자 추종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노 정권은 그 덕을 크게 보았지만 지도자 추종주의를 오해함으로써 낭패를 보았고 이젠 지도자 추종주의 문화에 발목이 잡혀 있다.

1980년 8월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전두환이 곧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들쥐(레밍)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위컴의 발언은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식으로 알려졌다.

물론 위컴의 발언은 ‘망언’으로 간주돼 격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재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러 지식인들이 위컴의 발언은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그의 진단에 타당한 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망언’이라고 분노한 이면엔 ‘들쥐’라는 단어가 톡톡히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그냥 ‘레밍’이라는 유별난 동물로 받아들였더라면, 반응은 좀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인이 강한 ‘지도자 추종주의’를 갖고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지도자 추종주의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드러나 보이게 한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의 정적들마저 그의 ‘탈권위주의’ 업적만큼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당 의원의 입에서 “대통령이 신(神)이냐”는 말이 나오게 할 정도로 여당은 대통령을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여당이 외친 ‘100년 정당’ 대신 ‘3년짜리 정당’으로 수명을 다한다면 여당은 지도자 추종주의에 편승한 ‘대통령당’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는 지도자 추종주의가 지도자 개인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 대통령은 지도자 추종주의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의 불평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는 자신이 여당에 간섭을 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는데, ‘권력’ 개념을 1차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 큰 문제는 열린우리당의 성공 이유를 지도자 추종주의라기보다는 국민의 개혁 열망으로 오인한 데에 있다. 물론 여기서의 개혁은 앞서 지적한 바 있는, 민생 문제와 무관한 개혁이다. 이건 노 정권에게 이중의 굴레다. 노 정권의 착각으로 인한 문제가 첫 번째 굴레라면 두 번째 굴레는 국민이 자기들이 보여준 지도자 추종주의에 대해 갖게 된 과도한 보상 심리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요구는 상호 방향이 어긋나 정권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해 민심 이반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열린우리당의 성공이 부메랑이 된 것이다.

정치개혁의 상징이라는 기간당원제가 한국 사회 특유의 연고주의를 넘어 뿌리를 내리는 게 가능할까? 11월23일 열린 우리당 중앙위원회에서는 기간당원제 요건 완화 등을 논의했다.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과도한 민중예찬과 참여의 불균형

이건 노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오랜 병폐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국민에게 무얼 요청하기보다는 늘 국민을 위해 무얼 보여주겠다는 정치 담론의 홍수 속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즉, 국민의 기대 수준을 턱없이 높여놓는 경쟁이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양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놓고선 나중에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리는 리더십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에 대한 염증만을 더 키우는 일을 범국민운동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자랑하는 초강력 연고주의는 서양 정치제도와 관행의 수입과 정착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 대해서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면 좋겠다. 예컨대, 지금 여야 정당들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간당원제만 하더라도 연고주의 장벽 앞에서 신음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성지’(?)라 할 전라북도의 경우 전체 유권자의 10%가 넘는 인원이 열린우리당 당원이다. 대부분 당비 대납으로 만들어진 ‘종이 당원’들이다. 이게 연고주의와 무슨 관계인가? 연고 없이 그렇게 당원을 급조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면 된다.

기간당원제가 정치개혁의 상징이라는 건 유럽 이야기지, 한국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입증하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가 끝나면 여야를 막론하고 ‘종이 당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돼 있다. 이게 단지 초기의 시행착오일 뿐일까? 과연 기간당원제가 한국 사회 특유의 연고주의를 넘어서 뿌리를 내리는 게 가능할까? 정당활동보다는 동창회나 향우회나 교회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사람들의 오랜 습속이 바뀔 수 있을까?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 선거만 해도 온갖 부작용이 속출해 회장 직선제를 택하지 않는 학회가 생겨나고 있다. 노동조합도 선거 때문에 타락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무성하다. 그래서 선거를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게 필요하며, 이는 한국 정치를 평가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정치는 한국인의 얼굴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가 늘 국민을 읽는 데에 실패하는 건 과도한 민중예찬론과 참여의 불균형 때문이다. 민중을 읽으려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민중을 ‘조작’하고 그 조작된 민중의 일부만이 큰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나중에 민중의 보복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감의 정치’ 사이클이 그칠 줄을 모른다. 유권자들은 늘 응징하느라 바쁘다. 역동성이 느껴져 그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선거가 엘리트 밥그릇 교체의 주기적 행사로 전락하는 건 우리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 우선 정치비평부터라도 국민 읽기에 주력해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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