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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예술, 그 팍팍한 노가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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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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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프로젝트 ‘도시의 색, 성남’ 전 안성희 작가의 조수가 된 김수병 기자…성남대로에서 ‘창조적인 사람들이 가장 나쁜 대우를 받는다’는 말을 절감하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프롤로그

어쩌면 ‘변신’을 꿈꾸면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 그리는 재주를 타고나지도 않았고 숨어 있을지 모르는 재주를 발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미술과의 연을 찾는다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수학점을 채우려고 미술사가 최승규씨가 강의한 ‘서양미술사’를 수강한 것을 꼽을 수 있겠다. 공휴일이어서 강의를 하지 못하면 늦은 오후에 빈 강의실에서라도 보충강의를 했던 강사의 열정은 오래 잊히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미술과 맺은 인연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재료비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여건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설치작가들의 삶을 엿보았다. 그것을 계기로 설치작가 안성희씨의 도우미(조수)로 변신할 기회를 잡았다.


장면1_ 성남대로
저기 숨은 정원을 보세요

성남의 정원을 찾아서 도시의 표정을 만든다. 시트지 양각글귀를 태평역 사거리의 자동차 매장 유리창에 붙였다.

경기도 성남시의 도로는 200여 개의 구릉지로 이뤄졌다. 고갯길이 수두룩한 것은 성남대로도 예외는 아니다. 도로변의 고갯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녹지 공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설치작가들은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강남과 분당에 낀 수정구 거리에 ‘성남의 색깔’을 입히려고 한다. ‘도시의 색, 성남’전을 기획한 것이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지만 구조적인 도시 분석을 시도하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일상과 공공장소에 살짝 개입하는 전시다.

김 조수: (성남대로변에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안 작가에게 간다.) 몸으로 때우려고 왔으니까 맡겨만 주세요. 볼거리가 있는 퍼포먼스를 하거나 조형물을 설치하는 작업도 아니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예술적 활동이 기대되네요.

안 작가: 일거리는 많이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모처럼 어시스턴트를 두고 하는 작업이라 미리 현장 조사를 했어요. 대형 백화점과 5일마다 서는 재래시장이 있고, 도로변에 주상복합 빌딩과 개인주택 옥상에 텃밭이 있는 성남이라는 도시에서 작가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는 작업입니다. 저는 성남대로변에 있는 ‘정원’을 찾아서 시민들의 일상에 소리 없이 다가서려고 합니다.

김 조수: (안 작가가 발견한 첫 번째 정원이 있는 모란시장 사거리에서) 이렇게 복잡한 거리에 정원을 설치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특별히 눈에 띄는 정원도 없는데요.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인가요.

안 작가: (성남대로 거리를 걸으며) 저도 처음엔 막연했어요. 몇 차례 성남대로를 걸었지만 무엇으로 성남의 거리에 표정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걸을 땐 보이지 않던 것이 버스에서 바라볼 때 보이기도 했어요. 농기계를 수리하는 가게에서 기다란 담쟁이 화분을 키우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어요. 그것을 바라보는 잠시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장면2_ 거리 수다
지원금 빠듯해 밥값도 자체 해결

‘도시의 색, 성남’전에는 6개 팀이 참가했다. 여기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참가했다. 마이클 카르키스는 성남대로 주변을 촬영한 동영상을 본 뒤, 시끄러운 도시의 소리 너머로 한적한 사운드를 경험하도록 했고, 박용석씨의 ‘신도시-성남기억’은 성남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을 인터뷰한 내용을 영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해질 무렵 성남대로변에 이어 가파른 골목길에서 설치 작업을 하고 있는 에밀고(말레이시아 태생의 중국계로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와 철을 재료로 작업을 하는 곽현곤씨 팀을 만난다. 이때 이번 전시에 참여하지 않은 ‘I’MPERFCT’ 디자이너 이상훈씨가 우연히 나타난다.

안 작가: (전봇대에 철판으로 만든 노란 조형물을 설치하는 두 사람에게 다가서며) 성남대로에서도 봤는데 가방이나 시장바구니를 걸 수도 있고, 이런 가파른 길에서는 손으로 잡고 올라올 수도 있겠는데요. 이제 설치는 거의 마쳤나요?

예술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경원대에 있는 퍼블릭디자인혁신센터에서 안성희 작가(오른쪽)와 함께 음각 시트지 작업을 하고 있다.

곽 작가: 어제도 밤늦게까지 설치했는데 아직 끝나진 않았어요. 오늘까지 하면 120개 모두 설치할 수 있겠는데요. 이런 것 하나 설치하는 것도 어찌나 까다로운지 몰라요. 구청과 시청 등에 허가를 받으려 했더니 설치할 수 있는 데가 전봇대밖에 없더라고요. 그것도 전시가 끝나면 탈착하는 조건으로 ‘임시허가’를 받았어요.

김 조수: (손바닥을 펴서 구부린 모양의 조형물 부착을 도우면서) 예쁘게 생겼네요.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만들었나요? 이번 전시가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한 문화예술진흥지원금 500만원을 예산으로 한다는데 벌써 거덜났겠네요.

곽 작가: 예산이 넉넉했다면 금형틀로 만들었겠죠. 일일이 수작업으로 구부렸어요. 이렇게 만드는데도 조형품 하나에 1만원이 넘게 들었어요. 물론 기획과 디자인은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이렇게 둘이서 찾아다니고 설치하려고 뛰어다녀도 인건비는 차치하고 밥값도 자체 해결해야 하지요.

김 조수: 그렇게 힘겹게 작품 활동을 해야 하는 건가요. 작가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작가료가 없다면 무엇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지….

안 작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탓이라는 듯) 그래서 전시를 기획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어요. 애당초 경기문화재단에 1500만원을 신청했는데 3분의 1로 줄었거든요. 만일 예산이 적다고 포기하면 향후 3년 동안 지원금 신청 기회마저 박탈되니까 규모를 줄여서 성남의 희미한 표정을 만들어야 했어요.

에밀고: 저야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기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죠. 영국 런던대학 골드스미스칼리지 엔젤라 맥로비 교수가 ‘창조적인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대우를 받는다’고 말했듯이, 작가로 사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작가: (한마디 거들어야겠다는 듯 끼어든다.) 더구나 회화, 조각, 섬유 등 재료에 따라 장르를 구분하는 데 익숙한 우리나라 미술계 풍토에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작가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삐딱해요. 저마다 관심 있는 아이디어를 여러 재료로 작업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회 분위기도 마찬가지죠. 저는 주로 표준에서 벗어나 폐기되는 용품으로 작업을 합니다. 외국기업에 메일을 보내면 항공으로 보내주기도 하는데 우리 기업은 비협조적입니다.

장면3_ 단순 작업
작업으로 지쳐보련다

지난밤 안 작가는 일곱 개의 정원을 소개하는 짧은 문안을 작성했다. 예컨대 다섯 번째 정원에는 ‘옥상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무를 꾸미는 사람들은 그 모습만큼이나 재미있는 사람일 게 분명하다’는 소개글이 딸린다. 이 글은 경원대학교 퍼블릭디자인혁신센터에 있는 롤라미네이터(문자를 도안해 칼집을 내는 기계)를 이용해 시트지에 옮겨야 한다. 내 일은 시트지에서 글자를 남기고 여백을 떼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계 전문가를 밤 12시30분까지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첫날 조수 노릇을 끝낸 뒤 철수하고 다음날 오후 3시쯤 안 작가를 센터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 조수: (일감이 줄었을 것이라 생각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이제 조수 노릇을 할 수 있겠네요. 어제는 기다리다 지쳤는데 오늘은 작업으로 지쳐보도록 하죠. 한때 골판지 공장에서 일했던 숙련된 솜씨로 단순노동을 즐겨보겠습니다.

안 작가: 그렇지 않아도 출력이 늦어져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글자를 돌출시키고 나머지 여백을 드러내면 됩니다. 정교한 작업이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데… 잘 드러낼 것으로 믿겠습니다.

김 조수: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어두워진다. 담배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들어와 일감을 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해도 해도 끝이 없군. 폼 잡고 작가 조수 노릇 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다리고 눈 빠지게 시트지만 들여다보는 것인 줄은 몰랐네. 그런데 낱글자 하나씩 도로 바닥에 붙여 문장을 만드는 게 간단치 않겠군. 그것도 내 일일 텐데 걱정되네. (잠시 머뭇거리다 안 작가에게 다가서 마치 위대한 발견을 한 것처럼) 아무래도 음각으로 글자를 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자모음 하나씩 붙이면 접착력도 약하고 부착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은데요.

안 작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틀린 말은 아닌데 글자를 음각으로 새기면 너무 눈에 띄어서 보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을까요. 저는 있는 듯 없는 듯 낮은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다가서고 싶거든요. 필요하면 글자를 작게 새겨서 음각으로 한 벌 만들어보죠. 시트지 작업 솜씨가 예사롭지 않네요.

김 조수: (뿌듯함과 황당함이 교차되어) 일단 하던 일은 마무리하고 음각 글자도 뽑아야겠네요. (내심 하던 일은 접기를 기대했지만 두 가지로 글자를 만들자는 대답이 돌아오자 힘없이 앉아 혼잣말을 내뱉는다.) 괜한 제안을 해서 일거리만 두 배로 늘어났군. 이런 속도로 작업을 하면 몇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겠네….

삭막한 거리에서 햇살 같은 미소가 피어오르길… . 성남의 정원 안내 글귀 옆에 있는 신발 문양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장면4_ 정원을 바라보며
무관심도 소통 방식

오후 4시에 시작한 도안 작업을 밤 10시쯤 마무리한다. 그제야 김 조수와 안 작가는 음각의 시트지 뭉치를 들고 7곳의 정원이 숨어 있는 성남대로에 간다. 모란시장 사거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멀리서 비치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이리저리 옮겨가며 작은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두툼하게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지만 찬바람이 살포시 파고든다. 지나는 사람들은 인도 모퉁이에서 뭔가를 붙이는 두 사람을 흘깃흘깃 바라보며 지나친다. 드디어 밤 1시를 지날 즈음 일곱 번째 정원 앞에 섰다.

김 조수: 간단한 작업 같은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네요. 지나는 사람들이 이 글귀를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나는 사람들이 여기 신발 모양을 보고 잠시라도 서서 정원을 바라봐야 작가로서 의미가 있겠지요.

안 작가: 꼭 그렇진 않아요. 지나는 사람들이 이 글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신발에 올라서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글귀를 읽어보기도 하겠지요.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는 것이지요. 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관객에 의해서입니다. 설령 지나치는 사람일지라도 제겐 의미가 있지요.

김 조수: (가로등 아래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바라야 하지 않나요. 더구나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취미로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안 작가: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지역사회와 ‘우리’를 생각하는 작업이지요. 이번 작업은 주변에서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개인적 관심 혹은 자기 치유도 들어 있어요. 스케이트를 타고 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개발 이전의 강남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이 작업은 성남에서 이뤄지지만 잃어버린 정원 혹은 텃밭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고 봐요. 그것을 모든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어떤 식으로든 소통은 이뤄집니다. 무관심도 소통의 방식일 수 있고요.

김 조수: (고개를 끄덕이며 문구 앞으로 가면서 마지막 정원을 기념해 사진을 찍으려고 안 작가를 부른다.) 그래서 작가들이 있는 것이겠지요. 어떤 작품이든 작가들의 고된 노동을 통해서 나온 결과물인 것은 틀림없네요. 어쨌든 작가는 작가이고, 조수는 조수일 수밖에 없겠지요. 조수는 쓸 만했나요?

에필로그

성남대로를 빠져나오면서 정원 안내 글귀가 며칠이나 유지될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른 아침 빗자루를 든 사람들에 의해 결정될 일이었다. 다음날 오후 지난밤에 길바닥에 붙인 글귀는 사라졌다. 안 작가는 “안내 글귀 부착 장소를 바꾸어 다시 설치하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내가 양각 시트지 작업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조수로 나선 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안 작가는 양각 시트지 뭉치를 들고 성남대로에 나가 글귀를 붙일 만한 실내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닌다. 계속 상황을 지켜보면서 수정을 하는 것도 ‘바깥 작업’의 일부였다. 안 작가는 놀이터 바닥에 있는 노란 신발 문양의 시트지에 올라서 정원을 바라보는 어린이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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