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이고 전설이고 마음에 간직한 사랑이었던 그 과거로의 미국여행
200만명이 모여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던 현장은 초라하고 쓸쓸했을 뿐! ▣ 김선주 <한겨레> 전 논설주간·칼럼니스트 10년 만의 미국 여행길이었다.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다시 뉴욕으로 스케줄이 빡빡했던 우리 부부를 위해 후배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우드스톡으로의 초대였다. 19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우드스톡은 단순한 지명이나 장소일 수 없다. 우드스톡은 신화이고 전설이고 마음에 간직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휘날리는 성조기에 섬뜩한 느낌
1960년대는 참으로 특별한 시대였다. 반전운동·학생운동·흑인민권운동·여성운동·소비자운동과 환경운동까지 온갖 종류의 인권운동이 세계를 휩쓸었고, 그것은 그대로 60년대의 사조가 되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까지도 이러한 거대한 인권운동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세계가 하나의 물결로 출렁거리던 시대였다. 그 시대정신의 총체적 발현이자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었던 거대한 해프닝이 바로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이었다. 우드스톡은 1969년 8월15일부터 나흘 동안 연인원 200만 명이 참가한 해방구였으며, 사랑과 평화를 국시로 내건 공화국이었다. 원래는 록 페스티벌로 기획됐으나 반전운동의 기수였던 존 바에즈를 비롯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산타나, 조 쿠커 등 록의 신화인 아티스트들이 줄줄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명분 없는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저지르는 만행을 노골적으로 저주했고, 노래로 연주로 폭발적으로 분노를 터뜨렸다. 히피들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세계의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미국 정부는 이 페스티벌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만약의 불상사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소나기가 쏟아붓는 진흙탕 속, 물자 부족과 악천후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내건 젊은이들의 페스티벌답게 한 건의 폭력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뉴욕에서 북쪽으로 1시간 반 동안 자동차로 달리는 우드스톡으로 가는 길은 단풍이 만발했다. 미국의 길로서는 드물게 꼬불꼬불하고 제법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곳을 지나며 이곳이 설악산 가는 길인 듯 내장산 가는 길인 듯 꿈꾸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모퉁이의 식당이나 가게에 심심치 않게 내걸린 미국 국기들을 보며 섬뜩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세계가 하나라는 기치 아래 평화와 자유를 노래했던 우드스톡에서 너무나 멀리 와 있는 미국의 현주소, 국기 게양으로 상징되는 애국주의의 거친 표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우드스톡엔 아무것도 없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씨 속의 우드스톡은 초라하고 쓸쓸했다. 그곳엔 젊은이들이 없었다. 늙은 히피들이 마당 앞에 내놓고 파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기념품과, 가족 나들이객이 전부였다.
추레하기 그지없는 늙은 히피들이 몇 가지의 타악기를 놓고 길모퉁이에서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이곳이 우드스톡이었다는 것을 회상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었다. 길바닥에 온갖 종류의 타악기를 내놓고 누구나 그것을 잡아들고 연주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손바닥만 한 종이상자에 평화기금으로 쓰일 돈을 모금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아무도 거기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양에서 온 늙은 여자 히피인 내가 그것을 눈여겨본 유일한 관광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0만 명이 모여 한목소리로 평화와 자유를 노래하던 그들은 모두 지금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드스톡이여 다시 한번!
미국은 안전했다. 특히 뉴욕은 안전했다. 이라크에서 베트남전보다 더한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반전이나 평화를 외치는 움직임은 없었다. 미국에 우드스톡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화나 자유보다 안정을 택한 것일까. 뉴욕은 경찰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시도 때도 없이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거리를 질주해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지금 뉴욕은 9·11 테러 이후 사상 최대의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여행객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뉴욕과 보스턴의 미술관은 입장료가 20달러씩 하는데도 줄이 200~300m씩 늘어서 있다. 뉴욕의 지하철도 보스턴의 지하철도 안전했다. 미국이 국내에서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은 안심하고 여행할 수 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미국이란 대륙만 안전하다면, 미국민만 안전하다면 세계 어느 구석에서 어떤 살육 행위가 벌어져도 그것은 아무런 이슈가 되지 못하는 세상임을 미국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드스톡은 꿈이었던가. 과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일까. 세계의 젊은이들이 하나의 가치로 세계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한 우드스톡이 실재하기나 했던 것인가.
과거로의 여행은 잔인하고 씁쓸하다. 옛사랑은 찾으려 해서도 안 되고 만나서도 안 된다는 말이 맞긴 맞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나는 ‘우드스톡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조그맣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200만명이 모여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던 현장은 초라하고 쓸쓸했을 뿐! ▣ 김선주 <한겨레> 전 논설주간·칼럼니스트 10년 만의 미국 여행길이었다.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다시 뉴욕으로 스케줄이 빡빡했던 우리 부부를 위해 후배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우드스톡으로의 초대였다. 19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우드스톡은 단순한 지명이나 장소일 수 없다. 우드스톡은 신화이고 전설이고 마음에 간직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휘날리는 성조기에 섬뜩한 느낌
1960년대는 참으로 특별한 시대였다. 반전운동·학생운동·흑인민권운동·여성운동·소비자운동과 환경운동까지 온갖 종류의 인권운동이 세계를 휩쓸었고, 그것은 그대로 60년대의 사조가 되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까지도 이러한 거대한 인권운동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세계가 하나의 물결로 출렁거리던 시대였다. 그 시대정신의 총체적 발현이자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었던 거대한 해프닝이 바로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이었다. 우드스톡은 1969년 8월15일부터 나흘 동안 연인원 200만 명이 참가한 해방구였으며, 사랑과 평화를 국시로 내건 공화국이었다. 원래는 록 페스티벌로 기획됐으나 반전운동의 기수였던 존 바에즈를 비롯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산타나, 조 쿠커 등 록의 신화인 아티스트들이 줄줄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명분 없는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저지르는 만행을 노골적으로 저주했고, 노래로 연주로 폭발적으로 분노를 터뜨렸다. 히피들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세계의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미국 정부는 이 페스티벌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만약의 불상사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소나기가 쏟아붓는 진흙탕 속, 물자 부족과 악천후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내건 젊은이들의 페스티벌답게 한 건의 폭력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뉴욕에서 북쪽으로 1시간 반 동안 자동차로 달리는 우드스톡으로 가는 길은 단풍이 만발했다. 미국의 길로서는 드물게 꼬불꼬불하고 제법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곳을 지나며 이곳이 설악산 가는 길인 듯 내장산 가는 길인 듯 꿈꾸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모퉁이의 식당이나 가게에 심심치 않게 내걸린 미국 국기들을 보며 섬뜩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세계가 하나라는 기치 아래 평화와 자유를 노래했던 우드스톡에서 너무나 멀리 와 있는 미국의 현주소, 국기 게양으로 상징되는 애국주의의 거친 표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너무나 안전한 미국에서 그 옛날 우드스톡의 혈기는 꿈결같다. 1969년 우드스톡에 내리는 비를 기지로 피하고 있는 젊은이들. (사진/ The Best of LIF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