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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활동가의 우울증과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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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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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주노총 상근자의 충격적 죽음과 잇단 노동운동가들의 우울증 판정
사회적 고립 속에서 깊은 무력감, 과연 그 운동은 영혼을 상실한 것일까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카뮈는 “노동이 없으면 모든 생명이 부패하게 된다. 노동이 영혼을 상실할 때 삶은 질식하고 죽음에 이른다”고 했다. 지난해 말 민주노총 서울본부 박상윤 사무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엇이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과 투쟁에 헌신적이었던 한 활동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일까? 박상윤 추모사업회는 “그의 죽음은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안고 있는 내면적 갈등과 고충을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말했다. 밤낮 없이 이어지는 조직 사업 토론에도 불구하고 노력에 비해 부족한 현실적 성과, 정파주의·줄세우기 풍토에 물들어가는 노동운동 내부 상황에 대한 깊은 고뇌가 37살의 한 젊은 노동운동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활동가들은 박씨의 죽음을 노동운동 내부에 퍼지고 있는 ‘우울증’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너 아직도 그 판에 있냐”


최근 민주노총은 사무총국 상근자 가운데 몇 명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어 직장건강검진 때 우울증 검사항목을 포함할 계획이다. 공공연맹에서도 상근자 두세 명이 최근 건강검진에서 우울증 판정을 받았고,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도 서너 명의 활동가들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노동운동가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우울증은, 카뮈의 말처럼 노동‘운동’이 영혼을 상실했기 때문일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 사태로 얼룩지고,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금품수수 비리로 감옥에 갇히고, 한국노총 지도부 비리 사건이 꼬리를 물고, 기아차노조·현대차노조는 ‘취업장사’로 비난받고, 여기저기서 노조 비리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활동가들 사이에 무력감이 깊어지고 있다. 옛날에는 노조 간부들이 주로 ‘노동탄압’에 항거해 분신했고 그래서 동료들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더 크게 분노하곤 했지만, 요즘의 우울증과 자살은 노동운동가들을 깊은 침묵에 빠져들게 한다. 어느 민주노총 상근자는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민주노총에서 일한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잇따라 터진 비리 사건으로 내 자신과 조직의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최근에는 사적인 모임에도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10월11일 새벽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에서 열린 비상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정회 중 한 간부가 계속된 회의에 지친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사진/ 김태형 기자)

노동현장에 들어가 청춘을 다 바친 활동가들한테 “너 아직도 그 판에 있냐”거나 우스갯소리로 “아직 손 씻지 못했냐”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다. 우스갯소리도 심상치 않게 들리는 계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활동가들한테 요구되는 건 교섭력·실무능력보다는 선명성과 비타협성이었다. 억압에 맞선 ‘노조 사수’와 어용에 대한 오랜 투쟁은 ‘순수한’ 진짜 활동가로서의 투쟁성을 강조했고, 해고와 구속이 진정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물질적 이익을 바라거나 사회적·정치적 지위 향상 및 출세를 위한 통로로 노조를 활용하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요즘의 비리 충격은 더욱 크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도 무력감을 낳는다. 힘있는 노동조합에서 투쟁의 구호는 요란했으나 결과는 언제나 조합원들만의 임금 및 복지향상으로 축적되었다. 게다가 그것은 대다수 주변부·비정규 노동자들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노동 문제는 오직 파업이 발생했을 때만 부상한다. 노동운동 세력이 노동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던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대변인을 지낸 손낙구는 지식인들이 대거 현장에 들어가 노조를 민주화·자주화했지만 노동자의 계급적 과제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배제·무관심은 현장에 뛰어든 활동가들이 추구했던 계급적 과제의 달성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직적·물질적 토대였던 대공장 노조의 교섭과 쟁의권도 ‘독점 기득권’이 되면서 노조는 ‘정의의 칼’보다는 기득권의 수호자에 그치고 있고, 노동운동이 ‘또 다른 가진 자’의 운동으로 고립되면서 활동가들의 방황과 우울증은 더욱 심해진다.

승리의 경험을 잊은 지 오래다

‘파업 피로감’도 커지고 있다. 1996년 말 노동법 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승리의 경험’을 잊은 지 오래다. 외환위기 이후 해마다 총파업을 부르짖고 있지만 노동시장 유연화, 구조조정 속에서 패배만 거듭하고 무력감에 빠져들고 있다. 싸움에 앞서 대화를 추구한다 해도 노동의 힘이 크게 약화된 탓에 사용자와 정부에 의해 이미 선이 그어진 ‘제한된 대화’에 그치고, 타협 직후 지도부가 날아가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해고·구속돼도 취업과 생계가 보장되지 않고, 조합원들이 예전처럼 끝까지 복직 투쟁을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활동가로서의 장래는 더욱 비관적이다. 더구나 조합원들이 노조 간부를 ‘커피 자동판매기’와 같은 존재로 여기고 실리적 성과를 바라는 풍토에서 대화조차 하지 않으면 깨지기만 할 뿐이다. ‘노동의 전진이 멈췄다’거나 ‘노동계급에게 안녕을 고할 때’라는 ‘안녕(Goodbye)학파’의 주장은 활동가들의 우울증과 맥을 같이한다.

노동조합의 사업은 핏대 세우고 머리띠 두르고 거리에서 공장에서 사장실에서 싸워야 하는 힘겨운 일인데 이런 일에 지치고 ‘되는 일은 없는’ 현실에서, 오랫동안 열정을 품었던 활동가들조차 다만 ‘한 사람의 노동자’에 불과한 자신을 발견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하나둘씩 현장을 떠나고 있다. 이래저래 ‘외롭고 어려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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