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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휴대전화 노예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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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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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세상읽기]

국가가 앞장서 파는 수출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셀룰러 이코노미의 그늘
새로운 ‘삶의 문법’의 가공할 위력 앞에 저항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대중문화의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한 가지 필수 사항은 ‘수출 경제’가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빨랐던 한국의 텔레비전 보급 속도는 당시 전자산업의 주요 수출 품목이 텔레비전 수상기였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텔레비전이 대중문화이기에 앞서 먹고사는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IT 선진국’을 위해 강요된 사랑

지금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쓴다기보다는 휴대전화가 사람을 쓰는 형국이 되었다. 대학교 축제에서 초대손님으로 인기가수가 등장하자 관객들이 열광하며 카메라를 꺼내들고 있다. (사진/ 연합)

제작 능력이 미처 따르지 못하던 상황에서 텔레비전 수상기의 급증으로 전 국민의 눈과 귀를 상대로 승부를 벌여야 했던 제작자들은 스스로 ‘노가다’로 부르면서 피 말리는 군사작전식 제작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 편집을 방영 직전에야 끝내 헐레벌떡 방송 시간을 맞추는 일도 허다했다. 신문들과 평론가들은 그걸 ‘날림공사’라는 식으로 비판하곤 했다. 드라마가 너무 많고 내용은 저질이고 죽기살기식의 시청률 경쟁에 매달린다며 ‘드라마 망국론’도 적잖이 제기됐다.

그런 식으로 핍박을 받으며 내공을 쌓아온 한국 드라마가 온 아시아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류’의 전위대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군사작전식 제작 과정을 거치면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순발력이 길러진 걸까? 전문가들은 ‘사전제작제’가 필요하다고 아우성쳤지만, 그때그때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제작 시스템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프로슈머 정신’의 실천은 아니었을까? 이건 한류 전문가들의 깊은 고찰이 필요한 사항임이 틀림없다 하겠다.

이제 한국 전자산업의 주요 수출품목은 휴대전화다. 지난해 휴대전화 수출은 모두 1억4800만여 대로 수출액 200억달러를 넘어서 자동차 분야를 제치고 반도체(약 250억달러)에 이어 2위 수출품목으로 올라섰다. 올해엔 전세계 휴대전화 3대 중 1대가 한국산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면서 ‘한국 휴대전화의 쿠데타’라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 경제는 ‘셀룰러 이코노미’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런 ‘쿠데타’와 ‘셀룰러 이코노미’를 가능케 한 밑거름은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휴대전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정보기술(IT) 선진국’을 이루기 위한 정치·경제적 목적으로 사실상 강요된 사랑이다. 한국인 특유의 ‘쏠림’ 현상을 순수한 자발성으로 보긴 어려우며, 그런 ‘쏠림’을 유도한 거대 권력의 전투적 노력이 있었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한류의 경우처럼 여전히 수출에 열광하는 한국인의 ‘수출 민족주의’를 위해서라도 한국은 휴대전화의 천국이 되어야만 했다.

우리는 휴대전화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아무리 봐도 사람이 휴대전화를 쓴다기보다는 휴대전화가 사람을 쓰는 형국이 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영화정보 사이트 ‘시네티즌’이 네티즌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사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76.5%가 자신의 벨소리나 진동이 울린 것 같은 환청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전화가 올까봐 집에서도 항시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는 응답자가 53.9%, 전화가 오지 않았는데도 수시로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는 경우도 59.2%에 달했다.

빵을 살 때도, 영화를 볼 때도…

국내 휴대전화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전자업체들은 기존 휴대전화를 버리고 새로운 모델을 빨리 사도록 유도하기 위해 숨가쁠 정도로 신속하게 새로운 기능을 갖춘 휴대전화를 양산해내고 있다. 심지어 ‘음주측정폰’까지 나와 4개월 만에 20만 대가 팔리는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 음주 측정뿐만 아니라 노래방, 음식점, 술집 등에서 노래방 기기나 텔레비전 리모컨 구실을 하는 휴대전화도 나왔다. 전자업체들의 풍성한 광고 물량에 늘 감사하는 언론은 소비자들에겐 ‘행복한 고민’이라고 주장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돈 들어갈 일만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연설도 폰카로 듣는다. 지난해 민주장 '평화선언' 행사에서 추미애 선거대책위원장이 연설문을 읽는 동안 시민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휴대전화는 2년만 쓰면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고 고장이 난다. 그러나 기술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불만을 토로하는 소비자에게 휴대전화 제조업체는 애국심을 발휘할 걸 권한다. 소비자들이 2년 넘게 휴대전화를 쓰면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망하기 십상이고 따라서 ‘셀룰러 이코노미’도 무너져 세계 제패도 어려워지니 눈 딱 감고 새것을 사라는 것이다.

학생들에겐 굳이 그런 권고를 할 필요가 없다. 2년도 길다며 스스로 알아서 1년 내에 바꾸기 때문이다. 지난해 YWCA의 조사에 따르면, 휴대전화를 가진 중·고등학생의 38.6%가 1년 이내에 휴대전화를 바꾸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에서 압수당할 때에 대비해서 사용하지 않는 구형 휴대전화를 여분으로 지니고 다니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기특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겠다.

휴대전화 열풍엔 국내 전자업체들의 맹활약 이외에 이동통신사들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가세했다. 1996년부터 이동통신사들의 가입자 유치 경쟁이 거세지면서 휴대전화 단말기 보조금이 등장했는데 “휴대전화를 돈 주고 사면 바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져 1999년 이동통신업계의 보조금 규모는 3조원이나 되었다.

이동통신 3사의 마케팅비는 연구개발비를 포함한 시설투자비의 2배나 된다. 마케팅 솜씨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몹시 사랑하는 민족주의 정신에 투철하다. 이들은 지난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이순신 장군 재평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역사적인 문제를 마케팅 소재로 적극 이용했다. 요금의 일부를 고구려 역사 지키기 기금으로 돌리는 ‘고구려 요금’을 내놓았고, 무선 인터넷 게임 ‘독도를 지켜라’를 서비스하기도 했다.

할인 마케팅 서비스도 지극해 “입장료 다 주고 영화 보면 바보”라는 말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할인 마케팅 서비스는 외식업체, 놀이공원, 제과점까지 파고들었다. 서비스가 어찌나 지극했던지 급기야 동네 빵집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동통신사들의 ‘빵 마케팅’ 덕분에 2005년 9월 기준으로 파리바게뜨 등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2002년보다 357점이 늘어난 반면, 자영 제과점은 전국적으로 1665개점이 문을 닫았다. 최근 동네 빵집 주인들로 구성된 ‘이동통신사 제휴카드 폐지 및 생존권 보호 제과인 비상대책위원회’는 “베이커리 시장의 55%를 차지하는 파리바게뜨가 SK텔레콤과 제휴해 빵값의 20~40%까지 할인해주는 것은 불공정거래행위”라며 파리바게뜨와 SK텔레콤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이동통신사들은 교육에 대한 애정도 지극하다.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두뇌 활동 증가, 졸음 쫓는 기능 등 공부의 효율성을 높이는 서비스를 앞다투어 내놓았다. 뇌에 유익한 알파파를 발생시킨다는 ‘모바일 총명탕’, 수능에 필요한 영어단어 3천 개 서비스, ‘2006년 수시모집 경쟁률 속보’ 서비스, ‘소화불량 도우미’, ‘수면 도우미’, MP3폰으로 듣는 ‘캡션 어학 서비스’ 등등.

카메라폰은 총과 같다

사진의 출현은 세상을 보는 문법을 바꿨다곤 하지만, 만인이 실감하는 문법의 변화는 카메라폰의 출현 이후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어떤 분은 ‘아무데서나 터지는 휴대전화 카메라’가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비난도 있긴 하지만, 내 눈에는 좋은 징조로 보인다. 그만큼 사람들이 켕기는 짓을 덜 하지 않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카메라폰은 긍정적인 사회 고발 기능을 잘 수행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카메라폰과 캠코더폰은 대중목욕탕이나 숙박업소 등에서 ‘몰래 카메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지만, 그것도 옛날 얘기다. 한 여가수가 찜질방에서 겪은 사건은 카메라폰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여가수가 라커룸으로 가서 옷을 입으려고 하는 순간 플래시 불빛이 번쩍했다.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카메라폰을 누르고 있었다. 여가수가 깜짝 놀라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학생은 몇 장을 더 찍고 있었다. 여가수는 여학생에게 재빨리 다가가 카메라폰을 뺏고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면서 사진을 찍은 이유를 물었다. 답은 ‘그냥’이었다.

사진학자 정한조는 <대한민국 사진공화국>이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냥’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는 “우리의 사진은 물론 영상 문화 전체가 병들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에게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기보다는 ‘정보의 쓰레기통’ ‘포르노의 바다’에 가깝습니다”라고 지적하면서, 그렇게 된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막 찍는 행위의 연장선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고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정한조는 ‘찍고 찍히고 퍼가는 세상’에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행위”라는 정의를 내리면서, 반드시 노크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초상권 침해와 사생활 침해를 해서는 안 되며 피사체에 대한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통화 도중에 보지 못한 방송을 다시 볼 수 있는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폰도 등장했다. DMB 단말기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생방송으로 보고 있는 시민. (사진/ 연합)

카메라폰은 총과 같다. 수전 손택이 잘 지적했듯이, “카메라를 사용할 때에는 항상 공격성이 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손택은 “사람들을 촬영하는 것은 그들을 폭행하는 것”이며 “총이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을 중독시키는 환상적인 기계”라고 말했다.

카메라폰은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독성이 더욱 강하다. 무언가 튀는 걸 카메라폰에 담아두려는 강렬한 욕구는 “나는 찍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낳게 할 정도다. 7·7 런던 테러 때 현장의 모습은 시민들의 카메라폰에 의해 전달됐지만, 카메라폰을 지닌 생존자들이 부상자들을 제쳐놓고 끔찍한 장면들을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는 증언이 나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제 카메라폰을 가진 모두가 카메라 기자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눈에 잘 보이는 풍경도 카메라폰에 저장한 뒤에 다시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카메라폰 애호가들의 세상 관찰법은 궁극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아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휴대전화는 이미 인간 두뇌의 기억 기능의 일부를 빼앗아갔다, 이제 눈의 기능까지도 침범하려는 걸까? 소유의 욕구 때문인가, 아니면 그간 프로만이 누릴 수 있었던 기존 영상 권력에 대한 도전을 추동하는 평등 욕구 때문인가?

휴대전화는 판타지 제공하는 ‘주인님’

‘손 안의 TV’로 불리는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폰’의 출현은 조금 황당한 감이 없지 않다. LG전자가 TV 방송을 60분간 녹화할 수 있는 ‘타임머신 DMB폰’을 개발했다고 밝혔을 때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기존의 DMB폰으로는 통화 도중에 중단된 방송을 다시 볼 수 없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방송 시청 도중 전화가 걸려오면 자동으로 휴대전화 저장장치에 방송이 녹화되는 기능을 부여했다나. 이에 질세라 삼성전자가 DMB폰으로 시청 중에도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상품 구매를 할 수 있는 양방향 데이터 방송 솔루션을 개발해 이를 처음으로 지상파 DMB폰에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을 때에도 우습긴 마찬가지였다.

꼭 그런 기능들까지 필요할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잠시라도 매체와 접촉하지 않으면 불편하게 여기는 걸까? 이동 중에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홀로 생각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자신의 여백을 스스로 채울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걸까? DMB를 즐기더라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의문이 아닐까?

사람들이 휴대전화에 미치는 건 스스로 미치고 싶어서가 아니다. 셀룰러 이코노미라는 동력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자 ‘삶의 문법’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 홀로 저항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휴대전화가 울리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홀로 무인도에 남는 기분을 어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나는 내 휴대전화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혹 나는 셀룰러 이코노미의 번영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는 소비자는 아닌가? 휴대전화를 아예 이용하지 않으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욕먹는 세상에서 우문일 것이다. 휴대전화 덕분에 우리는 소통의 풍요를 만끽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도 우문임이 틀림없다. 휴대전화는 소통을 위한 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이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판타지를 공급하는 나의 주인이다. 휴대전화가 생업의 영위에 필수적인 사람들을 빼놓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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