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유언
등록 : 2001-01-16 00:00 수정 :
설 합본호 기획회의를 하면서 몇 가지 고심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정초부터 표지이야기로 ‘유언쓰기’를 다루는 게 과연 적절한지, 그리고 유언을, 그것도 인쇄된 활자로 만천하에 공개되는 유언을 써달라고 사회저명인사들에게 청탁하는 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회의 때 <한겨레21> 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이번호 ‘만리재에서’는 편집장도 유언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솔직히 피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 사적인 내용을 담은 글을 쓰는 것을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탓도 있지만, 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남에게는 좋은 말을 하면서도 막상 자신은 빠져나가는 기자들의 못된 속성 때문입니다. 그래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나서도 글이 도무지 풀리지 않습니다. 도대체 죽으면서 남길 말이 이렇듯 없고, 정리할 일도 이처럼 없는 것일까. 게다가 평생 마감시간에 쫓기며 살아온 삶인데, 유언까지도 마감시간에 쫓기다니….
우선 두 딸에게. 유언을 쓴다고 하니 그래도 맨 먼저 자식들 앞으로 보내는 글이 되는구나.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하고 떠나는 심정은 이런 말로 대신하자. 너희들은 좋겠다, 다툼을 벌일 재산이 없어서. 살아서도 별로 자상한 아빠가 못 돼 인기가 없었는데 너희들의 기억에 얼마나 남을지 모르겠다. 너희들의 앞날에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겠지. 특히 여성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기 어려운 것은 너희들 세대에도 크게 바뀌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정의롭고, 주변을 자상히 배려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아내에게. 모든 짐을 혼자 어깨에 떠넘기고 가는 마음은 무겁지만 현명하게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소. 살아서 여러 가지로 속상하게 한 일도 많았고 불만도 많았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믿어주구려. 그리고 살아서 제대로 못한 것은 하늘나라에서 도와줄 것을 약속하오.
부모님들과 형제 가족들에게. 자식된 도리, 가족으로서의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납니다. 그래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삶의 상당부분을 기자로 살아왔지만 지나고보니 허망한 생각이 듭니다. 공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나머지 상처를 준 분들도 많았습니다. 제 자신 치밀히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겠다고 ‘떠들어댄 것’도 죄송스럽습니다. 특히 남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스스로 그에 걸맞은 도덕적·진보적 삶을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면 고개가 떨구어집니다.
여기까지 유서를 쓰고나니 제가 보아도 정말 싱겁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이 하루하루를 허겁지겁 살아온 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군요. 그래도 이 유서쓰기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한 단초가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미완의 유서는 이제 두고두고 고쳐나갈 생각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
kj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