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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기건 거기건 살아 있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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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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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돌아가고 호소하는 아내의 눈망울 앞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마음
가난을 이유로 상처주지 않는 파리가 천박한 서울을 쓸쓸하게 한다

▣ 홍세화/ <한겨레> 기획의원

아내는 프랑스 땅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입으로 말하지 않고 눈으로 말한다. 아직 눈물까지 보이진 않지만 눈물 없는 눈망울의 호소가 더 강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보다 1년 반 뒤에 귀국한 아내는 25년을 거기서 살았다. 남의 땅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내려고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함께 일한 친구들이 남아 있는 곳이 그곳이고, 장모님이 영원히 쉬고 계신 곳도 그곳이다. 여기엔 아내의 동기도 이젠 남아 있지 않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옛 친구들이 있지만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프랑스 속담이 한국 땅에선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아내는 오히려 그 친구들 사이에서 저급한 구설수에 오르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무척 운이 없다고 해야겠지만, 그런 일도 여기니까 생긴다.

인생 알만하다” 부동산 중개인의 눈빛


두 아이가 소속감을 느끼는 사회는 한국 사회가 아니라 프랑스 사회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교육과정을 모두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드컵 때 “프랑스와 한국이 경기를 하면 어느 편을 응원하겠니?”라는 나의 짓궂은 물음에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피해간 아이들이다. 만 두 살 때 건너가 누나보다 한국 사회의 소속감이 더 부족한 아들은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고 있다. 그 아이가 공부한 것으로는 ‘돈이 되지 않는’ 한국에 와서 살 가능성은 거의 ‘영’에 가깝다. 나이 육십을 바라보면서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거기로 돌아가자는 아내의 말 없는 호소는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내는 예를 들어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가 1년 만에 “‘지겨운 천국’보다는 ‘즐거운 지옥’이 더 낫다”고 말하며 되돌아왔다는 어느 노부부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해서, 아내는 거기서 지겹지 않으며 여기서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또 거기보다 여기가 훨씬 역동적이고 그래서 살 재미가 있다고 말한, 여기서 만난 몇몇 프랑스인들의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해서, 아내는 백인 프랑스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사는 자국민들은 백인들에겐 배려나 호의의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자국민들에겐 주지 않는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출신 이주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시선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사는 곳이 어딘지로 사람을 판단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 서울은 파리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사진/ AP)

아내가 여기서 즐거울 수 없었던 일 중엔 방을 구할 때의 일도 있다. 귀국한 뒤 처음 2년 동안은 사글세를 살았고 지금은 연립주택에 전세를 살고 있는데, 집을 구하려고 만났던 부동산 중개인들은 눈으로 아내를 위 아래로 훑으며 말 없는 말을 하곤 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 나이에 그런 집을 구한다니…. 그 인생 알 만하다. 그래도 옷은 잘 입은 편이네.” 크리스티앙 디오르 가게에서 일한 아내에겐 이른바 명품이 없지 않다. 아내의 옷차림새가 주었을 법한 기대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롯데 캐슬”이 공중파를 통해 토해지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토해낸 한숨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면 어떨까. 비록 작지만 파리 근교에 아파트가 하나 있다고 말이오.”

아내와 내가 그 사회를 고맙게 생각하는 이유 중엔 두 아이가 학교를 다니던 내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도, 가난하다는 이유로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거기엔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특히 교육은 아이들에게 경제동물이 되지 않도록 인문정신을 강조했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그 미덕은 승자의 몫이며 악덕은 패자의 몫인 당연한 법칙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천박한 자본주의를 말하고 천민성을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천박한 자본주의나 천민성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려는 듯하다.

게임은 인간 본성마저 빼앗고

자본주의 생활 방식의 특징은 ‘제로섬’ 게임에 있다. 주고받거나 빼앗고 빼앗기는 물질의 합은 항상 ‘영’이다. 내가 획득할 때 너는 빼앗겨야만 하고, 네가 승리하려면 나는 패배해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하는 것은 필경 이 성질 때문일 것이다. 인간성의 발현은 제로섬 게임과 정반대의 성질을 갖는다. 사랑이 그렇듯이 하염없이 주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성은 베풀수록 스스로 충만해지고, 베풀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샘이 마른다. 천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을 주고받고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에 익숙해진 구성원들은 마침내 인간 본성의 발현마저 패배하거나 빼앗기는 것인 양 느껴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 조상의 말을 정면에서 배반한다.

아내에겐 석달 만에 다시 돌아온 도시의 가을이 정겹지 않다. 아직 바람에 쓸려다닐 만큼 낙엽은 흔치 않지만, 하늘은 영락없이 차갑게 파랗다. 가을밤이 더욱 깊어가듯 쓸쓸함이 깊어간다. 그래서 아수라의 도시를 종내 외면하지 못한 채 살아보겠다고 바둥대는 내가 부러울 것이다. 여기서 계속 살아갈 만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내가 말할 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아내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내의 말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내는 끝내 여기를 떠나자고 강하게는 호소하지 않을 것이다. 내 대답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여기건 거기건 살아 있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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