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의 존재론을 ‘있어야 할 바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직관과 연결시킨다. 종교적 인간의 본래의 심성은 현 세계와 분명하게 분리되는 좀더 더 나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교정해야 할 어떤 것,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 ‘통과의 장소’이다. 종교적 인간은 따라서 혁명적인 세계관을 소유한 자이다. 그는 주어진 것,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없는 것쪽으로 움직인다. 그에게 세계는 늘 근본적으로 변해야 할 어떤 것이다. 그 세계관을 실어나르는 것은 바로 ‘믿음’, 지금은 없는 것, 그러나 앞으로 있게 될 세계에 대한 기다림, 그 기다림을 통하여 존재를 들어올리려는 실존의 기투이다. 성 바오로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교지도자들은 ‘와야 할 세계’ 대신에 ‘있는 세계’ 안에서 부를 늘리고 안위를 추구하는 것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부자들의 세속의 곳간을 더욱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들의 재산을 축성해주고, 그 축성의 대가로 자신들의 세속의 곳간을 치장한다. 그들이 더욱 큰 교회 더욱더 큰 사찰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부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자들과 힘있는 자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큰 교회, 큰 사찰이라야 일류병에 걸려있는 우리나라 부자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울면서 거리를 헤매는 예수와 부처 교회와 사찰을 통해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세속적인 사업에 투자하기도 한다. 대형 교회들은 종교 단체에 주어지는 각종 혜택을 이용하여 손쉽게 돈을 벌고 그렇게 쌓아올린 부를 세습하기까지 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 대체 이러한 행동들의 어디에 ‘와야 할 다른 세계’에 대한 비전을 찾아볼 수 있는가? 우리의 교회들과 사찰은 더이상 종교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영혼주식회사’처럼 보인다. 사회의 비리와 부정에는 더이상 아무 관심도 없고, 이미 가진 자들의 재산을 지켜주고 그들의 심적 안정을 축성해주고 그 대가를 받아 챙기는 세속적 마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와 부처는 그곳에 더이상 없다. 예수와 부처는 울면서 거리를 헤매고 있다. 종교는 한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 인간이 인간이어야 할 바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 인간은 있는 세계와 불화한다. 왜냐하면, 그는 유토피아에 대한 마르지 않는 갈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의 내벽에 흡반처럼 눌러붙어 있는 자들은 이미 종교적 인간이 아니다. 김정란/ 시인·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