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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혼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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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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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지금 각 분야에서 불거져나오는 개혁의 목소리로 시끄럽다. 그 목소리들은 그동안 덜 시급한 것처럼 여겨졌거나,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각 분야의 권력들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으로 부산하다.

그동안 ‘언론자유’라는 신화 뒤에 숨어서 모든 비판의 성역으로 군림해왔던 언론권력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는가 하면, 세속의 문제와 상관없는 체하며 각종의 세속적 이권을 챙겨왔던 종교권력의 문제까지 서서히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특히 종교계의 문제는 그것이 겉보기에 탈속적인 것으로 보여져왔기 때문에 더더욱 충격으로 다가온다.

‘와야 할 세계’와 ‘있는 세계’

우리나라처럼 종교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특히 개신교의 외적 성장은 눈부시다. ‘세계 최대’라고 하는 초대형 교회가 있는가 하면, 세계에서 몇대 안에 든다고 하는 신도수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즐비하다.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도 한집 건너 교회 십자가가 걸려 있다. 신도들은 방송사에서 비판적인 방송이라도 내보내면, 방송사 앞에 텐트를 치고 며칠씩 농성을 벌일 만큼 응집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대형 교회와 사찰들이 즐비한 이 나라에서 종교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교회는 날이 갈수록 대형화하고 화려해지고 있고, 사찰들 역시 점점 더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지만, 사회의 부패는 여전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어 가고 있다. 그 많은 교회와 사찰들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의 존재론을 ‘있어야 할 바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직관과 연결시킨다. 종교적 인간의 본래의 심성은 현 세계와 분명하게 분리되는 좀더 더 나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교정해야 할 어떤 것,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 ‘통과의 장소’이다. 종교적 인간은 따라서 혁명적인 세계관을 소유한 자이다. 그는 주어진 것,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없는 것쪽으로 움직인다. 그에게 세계는 늘 근본적으로 변해야 할 어떤 것이다. 그 세계관을 실어나르는 것은 바로 ‘믿음’, 지금은 없는 것, 그러나 앞으로 있게 될 세계에 대한 기다림, 그 기다림을 통하여 존재를 들어올리려는 실존의 기투이다. 성 바오로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교지도자들은 ‘와야 할 세계’ 대신에 ‘있는 세계’ 안에서 부를 늘리고 안위를 추구하는 것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부자들의 세속의 곳간을 더욱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들의 재산을 축성해주고, 그 축성의 대가로 자신들의 세속의 곳간을 치장한다. 그들이 더욱 큰 교회 더욱더 큰 사찰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부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자들과 힘있는 자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큰 교회, 큰 사찰이라야 일류병에 걸려있는 우리나라 부자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울면서 거리를 헤매는 예수와 부처

교회와 사찰을 통해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세속적인 사업에 투자하기도 한다. 대형 교회들은 종교 단체에 주어지는 각종 혜택을 이용하여 손쉽게 돈을 벌고 그렇게 쌓아올린 부를 세습하기까지 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 대체 이러한 행동들의 어디에 ‘와야 할 다른 세계’에 대한 비전을 찾아볼 수 있는가?

우리의 교회들과 사찰은 더이상 종교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영혼주식회사’처럼 보인다. 사회의 비리와 부정에는 더이상 아무 관심도 없고, 이미 가진 자들의 재산을 지켜주고 그들의 심적 안정을 축성해주고 그 대가를 받아 챙기는 세속적 마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와 부처는 그곳에 더이상 없다. 예수와 부처는 울면서 거리를 헤매고 있다.

종교는 한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 인간이 인간이어야 할 바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 인간은 있는 세계와 불화한다. 왜냐하면, 그는 유토피아에 대한 마르지 않는 갈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의 내벽에 흡반처럼 눌러붙어 있는 자들은 이미 종교적 인간이 아니다.

김정란/ 시인·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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