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사회적 교섭, 희망인가 배반인가

580
등록 : 2005-10-1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조계완의 노동시대]

노사정위로 상징되는 사회적 교섭 논란 끝에 폭력사태까지 일어난 민주노총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형성하기 어려웠던 한국에서 노사관계의 대안 될 수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올해 초 ‘사회적 교섭’ 안건을 놓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몇 차례 폭력 사태로 얼룩졌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학교’로 불리는 노동조합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하거나, 민주노총 조직 내부의 ‘범현장좌파’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국민파’로 대표되는 온건파간의 물리적 충돌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한국노동운동이 ‘탄력적인’ 사회적 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강경파는 노사정위원회 참여로 상징되는 사회적 교섭 안건을 폐기하라고 맞서고 있다. 그러나 본질 측면에서 대의원대회 폭력 사태는 한국 노동운동의 대전환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서막이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운동은 과연 사회적 교섭에 나서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개별 기업 수준의 교섭을 지속할 것인가?


비정규직의 노동조건, 사회적 합의로

사회적 교섭은 노동이 주로 임금 자제에 자발적으로 나서고, 국가와 자본이 그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정치적 교환의 메커니즘이다. 계급타협의 채널인 셈이다. 임단협을 끝내고 나면 노동조합의 1년 농사 다 지었다고 말할 정도로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교섭’이다. 사회적 교섭은 기업 또는 산업별 수준의 노사간 교섭 틀을 넘어 전국적 수준에서 노·사·정이 함께 테이블에 앉아 교섭하는 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교섭은 1998년 2월 노·사·정의 역사적 대타협이 첫 사례다. 그러나 1994년에는 한국노총이 임금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조직적으로 결의하고 정부와 사용자쪽에 먼저 제기하기도 했다. 한국노총의 이런 사회적 합의에 대한 민주노조운동 세력의 반발도 1995년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한가지 배경으로 작용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노동정책 관료들은 노동정책을 곧 임금억제 정책이라고 인식했고, 국가에 의해 강제된 사회적 합의 시도가 자주 이뤄졌다.

비정규직 문제가 터지면서 한국 노동운동에 '사회적 교섭'이 이슈로 등장했다. 2005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모습.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그런데 민주노총이 스스로 사회적 합의 카드를 꺼내든 건 무슨 까닭일까? 우리나라의 노조조직률은 11%에 불과하다. 전체 임금노동자 10명 중 단 1명만 조직노동자일 뿐이다. 노동조합이 없는 기업(대부분 중소기업)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해당 기업에 (정규직) 노동조합이 있어도 노조에 가입하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노동 조건은 누구와 어떤 ‘교섭’을 해서 쟁취할 것인가? 한국 노동조합은 1987년 대투쟁 이후 노조 자주화 및 민주화 과제는 성취했지만 전체 노동자의 계급적 과제는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기업별 교섭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노조 조직 구조가 산별노조인 유럽에서는 노조조직률이 20%라 해도 단체협약 적용률은 90%에 이른다. 예컨대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는 비록 노조가 없더라도 산별노조가 체결한 단체협약을 그대로 적용받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이 아무리 전투적이라해도 해당 기업의 조직된 노동자들만 대변하는 ‘분파적 경제주의’일 뿐 비정규직 문제, 일자리 창출, 제조업 공동화 등에는 전혀 손도 쓰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 내부의 분열만 확대시키고 있다. 대기업·공공 부문·정규직이 ‘또 다른 가진 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별 노조의 조합활동은 태생적으로 해당 기업의 경영 성과와 효율에 직접 연동되기 때문에 비정규직 철폐와 차별 해소라는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다. 지역·산별 또는 전국 수준의 노조만이 비정규직 저항에 나설 수 있고 연대임금 정책도 추구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이란 의제를 던진 건 이 때문이다. 조직률이 11%에 불과하지만 양대 노총의 노·사·정 대화는 ‘사회적 대화’로 불린다. 사회적 대화는 농민이나 의사한테는 주어지지 않고 ‘노동’에만 부여된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려면 교섭 체제가 산별노조이고 친노동자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특히 총연맹의 대표성이 확고해 조직 내부에서 사회적 합의를 단위노조들이 순응하도록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업별 노동조합운동에서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의 영향력은 의외로 적고, 현대자동차노조의 힘이 훨씬 더 큰 것이 사실이다. 과거 단병호 민주노총 집행부에서 계절마다 내걸었던 총파업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대의원들이 선거에서 사회적 교섭을 내건 이수호 집행부를 선택했음에도 정작 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이 통과되지 못한 건 이런 요인이 크다.

노조역량 강하지 못할 땐 배반될 수도

한국 노동자들은 분단 이데올로기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 추구 과정에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어려웠다. ‘노동자’가 사회적 실패와 동일시되는 사회에서 노동자라는 말은 지워버리고 싶은 존재였고,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살아도 밤에는 비싼 과외시켜 자녀를 출세시키려는 이기적인 아버지였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교섭은 노사관계의 새로운 대안이자 ‘집단적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는 제도일 수도 있다. 물론 국가와 자본에 대해 실체를 담은 합의를 이끌어낼 정도로 노조 역량이 강하지 못할 때 사회적 합의는 노동자들에 대한 배반이 될 수도 있다. 현재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인 김금수 선생은 어디선가 ‘노동조합운동에 희망은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노동‘운동’이 곧 미래라고 말했다. 운동 그 자체가 희망이라는 뜻이다. 폭력 사태는 옹호할 수 없지만,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도 어쩌면 노동운동의 한가지 희망은 아닐까?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