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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택시기사로부터 항의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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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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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토론회 발언이 “특종- 홍세화는 택시기사와는 얘기 않는다”로 둔갑
그들과 의견 나눌 땐 ‘존재 배반하는 의식’ 절감한다는 의미일 뿐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hongsh@hani.co.kr

며칠 전, 한 택시기사로부터 항의성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거칠었고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내가 한국의 택시기사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봤다면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택시기사와는 말도 나누지 않겠다고 했느냐”며 나를 준열히 꾸짖었다. 황당했고 당황했던 나는 전화를 끊은 뒤, 그가 알려준 <데일리 서프라이즈>를 찾아 검색해보았다. 과연 “홍세화 ‘나는 더 이상 한국 택시운전사와 얘기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제목 앞에는 ‘데일리 서프 특종’이라는 말까지 붙어 있었다. 나로선 그저 ‘허허’ 하고 웃을 수밖에. ‘더 이상 한국 택시운전사와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종이 될 수 있다니, 나는 실로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싸우면서 배운다고 했는데, 그 기사 제목만큼은 ’조선일보스럽다‘라는 표현에 딱 어울렸다.

어느 진보매체의 ‘조선일보스러움’


지난 5월 전교조, ‘학벌없는사회’ 등 교육시민단체가 ‘교육개혁안 10년, 한국 교육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연 토론회에 나는 발제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일제 강점기 이래 이 땅의 학교 교육이 계층 상승을 미끼로 절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심어주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해방 뒤에도 우리 교육 과정에는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학교가 일제 강점기의 황국신민화처럼 반공의식, 안보의식, 질서의식, 경쟁의식을 심어주는 기지가 되어 사회 구성원들에게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의식’을 갖도록 한다고 말했다.

파리의 택시노동 조건이 유럽에선 열악한 편에 속하지만 한국의 택시노동 조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발표 중 내가 ‘한국 택시운전사와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맥락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와 같은 국가주의 교육을 통해 갖게 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아무리 대화하고 설득을 해도 그 의식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려는 데 있었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존재를, 민중성과 인간성을 스스로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데, 그것을 고집하는 것… 민주적 통제가 없는 국가주의 교육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낳는지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기자에겐 그와 같은 나의 절박한 문제의식보다 ‘택시운전사와 대화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비쳤던가. 내가 ‘조선일보스럽다’고 말한 이유는 그래서인데, 물론 나는 한국 택시운전사와 얘기를 나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얘기를.

“프랑스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파리의 택시노동 조건이 유럽에서 열악한 편에 속하지만, 한국의 택시노동 조건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말도 마십쇼. …이 짓은 정말 사람 할 짓이 아닙니다.”

잠시 동안 우리는 죽이 맞아 서로의 경험을 나눈다. 한국의 택시기사들이 불친절하다지만 택시기사들만 불친절한 것은 아니다, 돈 없는 사람들에겐 모든 사람이 불친절하다, 유럽의 택시기사들이 손님들에게 친절하다면 그것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얘기 등은 빠지지 않는 내용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즐거운 얘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어도, 좁은 택시 공간은 자못 화기애애하다. 대개 그쯤에서 얘기를 마감하게 되지만, 먼 거리를 갈 때나 길이 밀릴 때는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가 바뀐다. 택시기사가 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래, 한국에 돌아와선 무슨 일을 하쇼?”

“저요, 지금 한겨레신문에 다닙니다.”

“아, 그래요. 한겨레신문사 운송부에 다니시는가 보지요. 역시 월급쟁이가 훨씬 낫지요.”

나는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거꾸로 묻는다.

“기사분은 한겨레신문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은 다양한데, 한겨레신문에 대해 긍정적인 소견보다는 부정적인 소견을 갖고 있는 분이 더 많았다. 그중엔 “운동권 신문이다” “편파적인 신문이다” “과격한 신문이다” “전라도 신문이다” 등이 등장하고, 심지어는 “빨갱이 신문이다”도 나온다. 나는 다시 묻는다.

“한겨레신문을 보시나요?”

<한겨레>는 ‘빨갱이 신문’이라는 생각

물론 우문임을 알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부정적 소견을 내비친 택시기사 중 아무도 <한겨레>를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런 신문을 왜 보느냐’는 식으로 백미러를 통해 나를 흘끔 쳐다보기도 한다. 그들이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소견은- 이것들이 의식을 구성하는데-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께도 물어보고 싶다. 택시기사가 어떤 계기를 통해 기존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한겨레>를 읽지 않고 갖게 된 <한겨레>에 대한 부정적인 소견을, 나처럼 같은 택시노동자 출신으로서 지금 <한겨레>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의 “<한겨레>는 그런 신문이 아닙니다”라는 얘기를 통해 바꿀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가? 이 지점이 내가 더 이상 한국 택시운전사들과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배경이며, 내가 “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끊임없이 되뇌는 이유다.

한번 형성된 사람의 의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나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임에도 일단 형성되면 고집한다는 점에서, 이 땅의 국가주의 교육이 낳은 폐해를 누가 감히 가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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