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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을바람, 코코아,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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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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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교수의 공동성명에서 어린 시절 읽은 이시카와의 시구를 만나다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의 주인공은 안중근이었단 말이냐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일본의 천재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짧은 시들을 집중적으로 읽은 시절이 있다. 내 나이 스무살 안팎이던 시절이다. 애간장을 녹일 듯이 슬픈 시편들이었다. 일본 제국의 심상치 않던 행보를 불길해하던 이 시인이 95년 전에 쓴 시 한수, 아직도 기억한다.

지도 위 조선 나라를


검디검도록

먹칠해가는 가을바람 듣다

마에다 교수의 소포가 날아들다

자국의 우경화 행보를 불길해하는 일본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평화와 환경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 배(Peace and Green Boat)를 타고 두 주일 남짓 여행한 것이다. 8월13일 도쿄의 하루미를 출항한 이 배는 광복 60주년을 맞는 날 부산에 입항했다.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 일본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공동 성명서를 낭독하는 자리에서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인 대표인 도쿄국제대학 마에다 데쓰오(前田哲男) 교수가 바로 위의 시편, 내 마음에 오래 머물러 있던 저 시편을 읊은 것이다. 95년 전에 쓰인 이 시 한수에, 일본의 우경화를 불길해하는 노교수의 마음이 실려 있는 것 같아서 퍽 인상적이었다. 마에다 교수와 나는 공동 기자회견 뒤로도 며칠 함께 지내면서 한-일 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에다 교수는, 내가 원문을 기억하지 못하는 위의 시편을 일본어로 정확하게 적어주기도 했다.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왼쪽부터 마에다 데쓰오 교수, ‘피스 앤드 그린 보트’ 일본쪽 대표 요시오카 다쓰야, 한국쪽 대표 최열, 이윤기씨.

그로부터 3주 뒤, 마에다 교수가 보낸 소포가 날아들었다. 두툼했다. 일본의 출판사 신조사가 펴낸 <신조 일본 문학 앨범> 중 한권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포켓판 시집 <다쿠보쿠>, 다쿠보쿠의 시편들을 녹음한 CD 한장. 그리고 또 있었다. 편지 한장과, 사이토 미치노리의 저서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나이>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마에다 교수의 편지 한 대목이 나의 시선을 확 잡아당겼다.

“…<신조 일본 문학 앨범> 가운데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첫 부분에 나와 있는 시 ‘코코아 한 스푼’은 대역사건(大逆事件)의 고토쿠 슈스이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되어 있지만, 안중근을 마음에 그리고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를 마음에 그리고 있다는 ‘코코아 한 스푼’은 어떤 시인가?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중략)

끝없는 논쟁 뒤

싸늘하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스푼 홀짝거리며

혀끝에 닿는 그 씁쓸한 맛으로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대역사건’은 또 무엇인가? 1910년, 메이지 정부가 일본 군국화에 걸림돌이 되는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대역’으로 몰아 무더기로 제거해버린 사건이다. 위의 시편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회주의 사상에 가파르게 기울어 있던 휴머니스트 이시카와의 견해 표명으로 해석되고 있었는데, 마에다 교수는 ‘안중근을 마음에 그리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가 보내준 책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나이>도, 한국의 일본문학자 오영진 교수(동국대)가 제기한 ‘안중근설’을 소개하면서 그쪽에다 무게를 두고 있다.

누가 나에게 피스톨이라도 쏘아주면…

마에다 교수가 부산에서 읊은 위의 시는 다쿠보쿠가 메이지 43년(1910)에 쓴 <9월 밤의 불평>의 한 스탠자(聯)다. 앞뒤의 스탠자를 배치하여 이 시를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잊을 수 없는 표정이다

오늘 거리에서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웃던 사내는

지도 위 조선 나라를

검디검도록

먹칠해가는 가을바람 듣다

누가 나에게 피스톨이라도 쏘아주면

이토 (히로부미)처럼

죽어나 볼걸

오영진 교수의 견해가 옳은 것 같다. 각 스탠자의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웃던 사내’ ‘조선 나라’ ‘이토 (히로부미)처럼’을 연결하면 ‘안중근 의사’라는 답이 나오는 것 같다. 마에다 교수는 만만치 않은 지출까지 감수, 많은 자료를 나에게 보내줌으로써, 95년 전에 순국한 ‘안중근’설을 지지해준 것이다.

마에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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