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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의 디지털은 디지털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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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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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앤드 그린 보트’에서 노래교실을 운영하다 만난 어느 일본 여성
포터블 인쇄기를 갖고 다니며 기를 죽였는데, 나보다 나이까지 많더라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평화와 환경을 생각하는, 500명에 이르는 한국인들, 일본인들과 함께 ‘피스 앤드 그린 보트’를 타고 15일 동안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순항했다. 눈뜨면 강의, 밥숟가락 놓으면 토론, 언필칭 해상 한-일 회의장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옛노래를 가르치다


나는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려면 먼저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은 일본인을, 일본인은 한국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앎은 관심이 되고 관심은 애정이 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무관심은 증오보다 유독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내가 이런 의견을 드러냈을 때, 일본쪽 공동대표 요시오카씨는 내게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교육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어느 날 저에게 물으시더군요. 텔레비전을 보니 김정일과 ‘욘사마’가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던데, 어찌된 일이냐고요. 어머니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도통 없으셨던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무엇을 알게 할 것인가? 노래로써 시작할 생각이었다. 나에게는 일본의 옛 노래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다. 나는 일본의 흘러간 노래를 통해 일본인의 정서를 조금 알게 되었고,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약간의 애정을 기울이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노래 교실’을 열고 거기에서 가르칠 노래 10곡의 악보를 준비했다. 한국인들에게 가르쳐줄, 일본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일본 옛 노래 5곡, 일본인들에게 가르쳐줄,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우리 옛 노래 5곡을 준비했다. 노래 교실의 학생 수를 20명으로 추산하고는 컴퓨터로 악보를 읽어들이고, 이를 읽기 쉽도록 확대해 20장씩 인쇄하기 시작했다. 인쇄한 악보는, 노래를 배우는 사람들이 철해서 관리하기 쉽도록 일일이 투명 내지에 끼워넣었다. 그런데 100여장을 인쇄해서 투명 내지에 일일이 끼우고 있으려니 나 자신이 약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500명이 넘게 승선하는 대형 여객선인데 인쇄기나 복사기가 한 대도 없으랴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머리 허연 나까지 디지털 세대를 자처하는 이런 디지털 시대인데? 정 안 되면 기항지에서 하지, 이렇게 생각하고는 5장의 악보만 인쇄해 투명 내지에 넣고는 작업을 그만두었다. 5장의 악보를 복사해서 일일이 투명 내지에 끼워놓고 보니 그 분량이나 무게가 벌써 만만치 않았다. 디지털 시대에 내가 짊어져야 할 아날로그 짐이었다.

배에 오르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깨달았다. 인쇄기나 복사기가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4쪽짜리 타블로이드판 일간신문을 인쇄하는 시설까지 준비돼 있었다. 수십대의 노트북 컴퓨터로 기사를 쓰고 신문을 편집하는 진행요원들의 사무실에는 디지털 사진 컬러 인화기까지 준비돼 있었다.

일본 여인은 단둥의 압록강 다리 사진에 사연을 한글로 간단하게 써넣은 엽서를 나에게 건넸다. 왼쪽 다리는 물류가 오가는 다리, 오른쪽 다리는 사람이 오가는 다리다. 이쪽은 중국, 저쪽은 신의주다. (사진/ 류우종 기자)

노래 교실은 나와 우리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씨가 운영했다. 거의 매일 밤, 15명 안팎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모여 일본과 한국의 옛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항해가 끝나던 날 밤 중앙 홀에서 있었던 발표회에서 큰 박수를 받았으니 노래 교실은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래 교실이 아니다. 노래 교실의 한 여학생이다.

노래 교실이 열리던 첫날 밤, 한 일본 여성이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나도 그에게 넉넉하게 준비해간 내 명함을 건넸다. 우리말을 배우고 있던 이 일본 여성은 노래 교실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일본의 옛 노래를 잘 알고 있어서 내가 틀릴 경우 바로잡아주기도 하고, 우리의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했다. 모르는 노래는 처음부터 배우기도 했다. 이틀이 지났을 때, 그가 다시 내게 명함을 건넸다. 이틀 전에 나에게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명함이었다. 그의 새 명함에는 객실 번호까지 찍혀 있었다. 조금 의아스러웠다. 도쿄에서 승선할 때 이미 객실 번호를 알고 명함을 박아온 것일까? 이상하다, 객실 번호는 어째서 공개하는 것일까?

압록강 앞에 선 일본인의 안타까움

북한과의 접경에 있는 중국 도시 단둥에서 이 일본 여성은 또 한번 나를 놀라게 했다.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북한 도시 신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것도 우리말로. “선생님, 마음이 참 보꾸잡(복잡)하시지요? 저도 너무 안타까워요.”

물의 도시 쑤저우에 다녀와서도 나를 놀라게 했다. 선승(禪僧) 한산(寒山)이 머물렀다는 절 한산사에서 무거운 <한산사비각집>(寒山寺碑刻集)을 한권 샀다. 배로 돌아와 비각 글씨를 읽으려는데 글씨가 너무 작고 희미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가 내게 다가왔다. “너무 작고 희미해서 읽을 수가 없어요” 하자 그가 손가방에서 포토테이너(디지털 사진 저장장치)를 꺼냈다. 그때까지 그가 찍은 사진은 고스란히 그 포토테이너에 저장돼 있었다. 그는 문제의 비석을 찾아내고는, 단추를 눌러 그 사진을 좍좍 확대시키더니 문제의 글씨를 내게 보여주었다. 외국에서 책 사고 그렇게 부끄러워지기는 처음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도 그는 내가 이따금씩 이용하는, 우리가 ‘LSD’라고 명명한, ‘담배 피우는 것들의 라운지’(Lounge for Smoking Devels)에 나타나 한참씩 이야기를 나누다 가기도 했다. 나는 매우 서툴지만 일본어로 말하려고 노력했고, 그는 매우 서툴지만 한국어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소통이 정 안 될 경우 영어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5일 가까이 그렇게 지내고 나가사키에서 헤어지던 날, 그가 나에게 엽서 한장을 건넸다. 놀랍게도 단둥의 압록강 표지석 앞에서 찍은 그 자신의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엔 내게 보내는 사연이 한글로 쓰여 있었다.

“李潤基 樣. 자는 너무 안타까워요. 간강하세요. 또 만나요. 감사함니다.”

압록강 앞에 선 일본인의 안타까움, 가슴 저렸다. 그래서 말머리를 틀어, “인쇄기 가지고 다니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럼요. 벌써 수백장 인쇄해서 친지들에게 다 부쳤는걸요. 배 안에 인터넷이 없어서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나의 디지털은 디지털도 아니구나 싶었다. 사족을 달아야겠다. 이 일본 여인은 1947년생인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더 많은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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