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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통치자금’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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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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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조금 뜸해졌지만 천문학적 액수를 언론이 알기 쉽게 설명할 때 곧잘 사용하던 방법이 있었습니다. 만원짜리 지폐로 쌓으면 높이가 얼마가 되고, 만원짜리를 한줄로 늘어놓으면 몇 킬로미터이고, 일반 샐러리맨의 몇백만년치 월급에 해당한다는 식입니다. 검찰수사 결과 지금까지 확인된 옛 안기부 자금의 불법지원금 1162억원을 이런 셈법을 동원해 계산해보니, 만원짜리 지폐를 한줄로 늘어놓으면 서울과 부산을 2번쯤 왕복할 수 있고, 전 국민에게 나눠주어도 한 사람당 2500원씩은 돌아가는 액수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번 사안이 진흙탕 정치싸움으로 변질된 탓도 있지만, 이제 웬만한 돈의 분탕질에 대한 충격이나 분노로부터 졸업한 탓도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정부가 몇조, 몇십조원을 마치 아이들 과자값처럼 쉽게 말하는 탓에 일반서민들도 덩달아 간이 커져서 웬만해서는 눈도 꿈쩍하지 않게 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통치자금’이라는, 출처불명의 단어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코드가 된 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다만 그 징수와 배분방식이 조금씩 진화해 왔을 뿐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 그들이 재임기간에 거둬들인 돈은 당시 검찰수사 결과 각각 2259억여원, 2838억여원. 그것은 ‘직접세’만 계산한 것일 뿐, 당시에도 안기부의 ‘눈먼 돈’이 통치자의 사금고 역할을 했을 게 분명했으리만큼 ‘간접세’까지 포함하면 그 액수는 훨씬 많았겠지요. 그리고 이번에 확인된 분명한 사실은 김영삼 정권 들어서도 ‘간접세’는 여전했다는 점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안기부의 자금이 불법사용된 시점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뇌물수수죄 등으로 사법처리한 직후였다는 점입니다.

과거는 그렇다치고, 눈길은 당연히 ‘지금’으로 쏠립니다. 물론 현 정권이 안기부 자금의 불법전용 등의 똑같은 방법을 되풀이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먼 훗날 또 어떤 기발한 수법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나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너무나도 위정자의 말에 속아서 살아온 탓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분명히 확인된 것은 안기부의 철저한 ‘절약정신’입니다. 1년에 1천억원이 넘는 돈을 ‘근검절약’하고도 끄떡없이 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음이 입증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현 정권 들어서 국정원 예산이 예전에 비해 대폭 삭감됐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예산의 사용내역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허물을 들춰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철저히 분노하고 바꿔나가자!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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