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을 꿈꾸는 수다장이 전문의
등록 : 2001-01-09 00:00 수정 :
서울 강남 차병원 132호의 방주인은 수다쟁이다. 죽이 맞으면 환자들과 남편 욕도 하고 세상 욕도 한다. 수십건의 외래진료, 이어지는 분만과 수술 등으로 매일매일 긴장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산부인과 전문의 고명인(40)씨는 행복하다. 먼 길을 에둘러 자신이 설 곳을 찾았고, 무엇보다 만나는 이들 대부분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그가 펴낸 <나도 세상에 태어난 값을 하고 싶다>(명진출판)가 그저 한 성공한 여자의 성공담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그의 남다른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전업주부 2년차에 의대입시 공부를 하고 서른여섯에 전공의가 됐다. 좋은 남편 만나 먹고살 걱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에게는 세상과 자신을 향해 ‘반란’을 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스물세살 때 한 대기업 공채에 여자로는 처음으로 뽑혔지만 그는 내내 남자동기들 뒤치다꺼리만 해야 했다. 그뒤로 방송사 아나운서가 됐지만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퇴직해야 한다는 서약서를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방송계 역시 호의적인 곳만은 아니었다. 그가 겪었던 사회는 여자를 ‘꽃’으로만 대접하는 불공정한 게임의 공간이었다. 전업주부로 출발한 가정생활에서도 그는 내내 불안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어느 날 문득 그 이유를 깨달았다. 성(性)을 기준으로 한 세상의 차별에 스스로 지레 겁먹고 주눅들어 있던 것이다. 여성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데 세상은 협조적이지 않다. 그런 세상의 룰을 깰 수 있는 이는 여성 자신밖에 없다.
그다지 아름다운 문장도, 거창한 대의도 담겨 있지 않지만 <나도 세상에…>에는 마흔줄에 접어드는 이 땅의 여성들이 겪었을 법한 기대와 배신, 환상과 절망이 정직하게 펼쳐져 있다. 그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다. “공정하지 않은 규칙을 깨기 위해서라도 여자의 성공은 필요합니다.” 부와 명예가 따르지 않아도 좋다. 아주 작은 것,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걸 이룬다면 그게 성공이다. “하지만 일단 성공했다고 느끼고 자신은 보통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안주할 때 그 성공은 또다른 차별을 만들어내는 독소조항이죠.” 그는 안주할 수가 없다. 아직도 수많은 여아들이 탄생과 동시에 차별받기 시작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곳이 그의 일터이기 때문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