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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뫼동 밤나무 숲에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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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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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의 20분의 1만 헐어줘도 좋으련만 친구는 내게 술만 사주었네
퍼담도록 알밤은 지천인데 거기 없는, 그래서 줍지 못할 사람을 생각하며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2002년 가을, 취재차 프랑스 파리를 여행했다. 베르사유 궁전에 딸린 드넓은 뜰에 그리스와 로마 신화 관련 대리석 조상(彫像)이 많다고 해서 그리로 자동차를 몰게 했다. 겉으로만 그랬다. 내가 의중에 찍어놓은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뜰은 과연 넓었다. 대리석 조상도 많았다. 사진을 찍었다. 거기에서 멀지 않은 ‘뫼동’이라는 지명이 하루 종일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진 찍기가 거의 끝났을 때 자동차를 운전해준 동서가 물었다. “형님, 늦어서 파리로 바로 들어가야겠는데요?”

그럴 수가 없어서 내가 우겼다. “어림없는 소리. 뫼동 들러서 가세. 나는 밤나무 숲을 꼭 보아야 해.”

70년대 초, 나는 잡지 기자였다. 첫 월급이 2만8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방 하숙비가 2만원이었다. 월부 책값으로 1만5천원쯤 나갔다. 그 적자를 어떻게 감당하면서 살았나 싶다. 월급이 4만원으로 오르기까지 퍽 힘들었다.


어느 쌍둥이 형제와 ‘퍼주기’

나에게는 유복한 친구가 있었다. 그 시절에 이미 기혼자였다. 그 친구의 한달 용돈은 내 수입의 10배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많이 얻어마셨다. 하룻밤 술값이 내 월급과 맞먹을 때도 있었다. 미안했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술을 살 수 없었다. 나의 자존심을 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나에게 술을 무제한 샀을 뿐 생활비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자기 용돈의 20분의 1만 헐어도 한 친구의 삶이 무척 윤택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 친구가 몰랐을 리 없다. 남편이 나와 그렇게 마셔댔는데도 그의 아내는 나에게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 부부에게 고마워한다.

그 시절의 내 고향에는 부모 모시고 살던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재산에 일찍 눈떴던지 이 쌍둥이 형제는 아버지 세상 떠난 직후부터 논밭 상속 문제로 대가리 터지게 싸우더니 곧 서로를 원수 삼기에 이르렀다. 형은 제 몫의 재산을 처분하고는 도시로 나갔다. 아우는 시골에 눌러앉아 홀어머니 모시고 농사를 지었다. 아우의 살림은 나날이 어려워졌지만 도시로 나간 형은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홀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부자가 된 형의 처지가 난감해졌다. 홀어머니 생전에는 그럭저럭 나 몰라라 할 수 있었지만, 그 홀어머니 상청(喪廳)에서는 쌍둥이 형제가 재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회하고 화해한 뒤에야 형은 아우가 금융기관에 진 빚 때문에 큰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형은, 옛정을 잊지 못해 아우의 빚을 갚아주고 싶었다. 아우의 빚이라고 해봐야 형이 세대나 보유하고 있는 자동차 한대 값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수입의 10분의 1만 헐어도 아우의 빚을 갚아줄 수 있는데 형은 아내의 견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보다 못한 형은 고향에서 아우가 모시던 부모 제사의 제수를 마련하는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은밀하게 아우를 지원했다. 그 지원이 아우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아내와 처제 부부는 몰랐을 것이다. 나 혼자 숲에서 오줌 누면서 펑펑 울다 나왔다는 것을.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내가 눈가를 말끔하게 닦고 코까지 여러번 풀고 나왔으니.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아내가 정식으로 남편의 은밀한 아우 지원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아내는 남편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지원하는 돈이 정확하게 제수 마련하는 데 쓰이느냐? 아우가 술을 엄청 좋아하는데 술값에 쓰이는 것은 아니냐? 지출 명세서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투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

형으로서는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어떻게 물어볼 것인가? 어렵사리 화해한 쌍둥이 아우가 아닌가? 아우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 터인데 형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지출 명세서를 요구해?

북한 사람들 여기에 왔으면 좋겠지요?

1971년, 나는 육군병장 신분으로 베트남에 있었다. 월급이 57달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환율로 치면 6만원이 채 안 되는 액수다. 하지만 그 월급은 내가 베트남에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52달러는 본국 은행에 자동으로 입금되고, 나머지 5달러만 우리가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1년간 근무하고 귀국해서 찾는 액수는 약 600달러. 그게 그 시절에는 큰돈이기는 했다. 그로부터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세월도 안 흐른 모양인가? 개성공단의 북한인 근로자 월급이 60달러 안팎이라는 보도를 접한 날 속이 몹시 쓰렸다.

홍세화 선생의 책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는 홍 선생 부부가 파리 근교 뫼동 숲에서 밤을 줍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천으로 떨어진 밤을 줍고 나오면서 부인이 했다는 말, 다 주울 수 없을 만큼 많이 떨어져 있는 밤을 뒤돌아보면서 부인이 했다는 말 한마디. 여보, 북한 사람들 여기에 왔으면 좋겠지요?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게 있어서 그 대목 읽다 말고 책을 덮었다. 한 문학상 심사하고 문학평론가들과 저녁식사 함께 하면서,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어이 이 이야기를 꺼내었다가 또 울컥하는 게 있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눈물만 보이고 저녁도 먹지 못했다.

우리 시골집 뒤에는 아름드리 밤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한 주머니 불룩하게 주우려면 한동안 개울을 따라 오르내려야 한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 나오는 뫼동의 밤나무 숲을, 시골집 뒤 개울가에 있는 밤나무 숲으로 상상했다.

아니었다. 파리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뒤엉켜 있는 거대한 숲이었다. 개울은 없었다. ‘지천’이라는 말은 뫼동 밤나무 숲 알밤을 묘사하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부부와 처제 부부는 밤을 주운 것이 아니었다. 퍼 담았다. 처제 부부가 겨우내 먹을 수 있을 만큼 퍼담는 데 20분이 채 안 걸렸을 정도다.

내 아내와 처제 부부는 몰랐을 것이다. 나 혼자 상수리 숲에서 오줌 누면서 펑펑 울다 나왔다는 것을.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내가 눈가를 말끔하게 닦고 코까지 여러 번 풀고 나왔으니.

뫼동 숲에 가서 운다고 통일이 되냐? 안 될 테지. 하지만 나는 소설가여서 소설가처럼 한번 굴어보았다. 그럼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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