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물질의 욕망만 꿈틀대고 정의로운 자들을 ‘왕따’시키는 사회
<한겨레>는 고통스럽더라도 ‘흰색’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hongsh@hani.co.kr 회색 도시. 콘크리트 건물과 공해로 뿌연 하늘, 한강은 아파트군에 포위당해 빛을 잃었다. 서울은 다이내믹하지 못한 사람에게 우울을 강요하는 회색의 도시다. 그 한곳에 <한겨레>가 있다. 저잣거리에서 사람 냄새를 좀처럼 맡기 어려운 것은 분명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내 우울증 탓일 것이다. 사람의 길은 자동차길에 밀려났고,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의 길’을 찾지 않듯이, 젊은이들이 <한겨레>를 별로 찾지 않는다. “부자 되세요!”는 이 사회에서 반어법이 아니다. 물질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한편,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모색과 긴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민주/반민주의 긴장이 사라진 ‘민주화된 시대’에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 성숙을 위한 모색과 긴장을 촉발하며 함께 커야 할 <한겨레>의 설 자리가 너무 좁다.
흰색은 왕따, 검은색은 마녀사냥 비인간화된 욕망은 물질과 출세를 가치 판단과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일본군 출신 독재자의 딸이 환호받을 수 있는 것은 과정이 어떻든 경제성장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회색의 사회가 받아들인 새 ‘원칙’에 의해서다. 전두환의 의리와 카리스마가 거론되는 것 역시 과정이 어떻든 출세한 자의 비범한 능력이 평가되는 새로운 ‘상식’ 때문이다. 이처럼 과정이 어떠하고, 수단과 방법이 어떠하든, 물질과 출세를 획득하는 것이 원칙이고 상식인 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성의 항체를 상실하고 물신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 빚어낸 결과다. 뿐만 아니라, 이 욕망은 사회에 팽배한 경쟁과 효율 만능주의를 더욱 부추긴다. 이윽고 구성원 상호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불가능하게 하고 구성원들이 인간 존재를 스스로 배반하는 의식과 가치관을 갖도록 한다. 이 사회의 욕망의 색인 회색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하다. 회색은 배경이 흰색일 때 검은색이 되고 검은색이 배경일 때 흰색이 된다. ‘회색인들의 회색의 사회’에서 흰색이 조직과 사회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다. 흰색은 검정은 물론 회색까지도 검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겨레>의 슬픈 자화상의 배경일 수 있다. 점잖은 꾸중으로 포장되기도 하는, <한겨레>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대개 내부 고발자나 촌지 거부 교사에 대한 왕따처럼 고발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검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이 사회의 방어본능의 반영이다.
한편, 회색인들의 회색의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검은 목표물’의 색출과 고발, 그리고 비난에는 대단히 적극적이다. 자신이 희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최근의 국적포기 논란과 관련해 애국자들이 갑자기 양산된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민족이 없는’ 군대가 애국심의 잣대가 되는 모순을 발견하기보다 ‘나는 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표적이 된 목표물은 검을수록 좋다. 언론은 그 표적이 얼마나 검은지 선정적으로 알리면서 마녀사냥의 여론재판을 주도한다. 그것은 언제나 일회적이고 일시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회색인들의 사회는 또 다른 먹잇감이 나타날 때까지 회색의 평온을 되찾는다. <한겨레>가 여기 머물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회색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이 되어 어느 쪽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대혁명기의 중간파들을 혐오했다. 중간파란 곧 회색파다. 흰색이 승할 땐 그쪽에 붙고 검은색이 승할 땐 또 그쪽에 붙어 끝까지 살아남아 권력의 맛을 끝까지 누렸던 세력이다. 이 땅에서 회색은 때론 ‘실용’으로 탈바꿈한 ‘개혁’처럼 ‘공허한 이상주의를 극복한 합리적 현실주의’의 모습이 된다. 심지어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경우처럼, ‘공과 과에 대한 성숙한 대처’를 주문하기도 한다. 이 주문은 삼성에 이르러서는 아예 당당해진다.
‘제2창간운동’은 회색을 거부하는 일
무노조 경영을 위해 온갖 비리를 마다하지 않고 편법으로 경영을 승계하는 삼성이지만 400억원이 넘는 돈을 내놓았으니 철학박사 학위를 주어도 문제될 것 없다고 주장한다. 큰 ‘공’을 세운 기업의 작은 ‘과’를 문제 삼는 것은 고마움을 모르는 소인배의 소치가 된다. 삼성은 이미 자신의 검은색을 탈색할 만한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고, 대학의 젊은이들은 삼성의 행태를 비난하면서 삼성제국의 일원이 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흰 것이 흰 채로 검은 것이 검은 채로 각기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흰 것과 검은 것이 서로 뒤엉키고 버무려진, 영악한 사람들을 위한 회색의 사회의 모습이다.
회색인들의 회색의 사회에서 <한겨레>는 스스로 흰 배경이 되어 이 사회에 팽배한 회색과 검은색을 도드라지게 할 소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권력이 시장에 넘어가고 신문이 주로 기업의 광고로 먹고사는 상황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가령 신문 한 지면의 상단에 기업 비리를 파헤친 기사가 실리고 하단에 그 기업의 광고가 실리는 아름다운 일은 회색의 사회에선 언감생심이다. 더구나 원칙이나 상식에 대한 요구가 근본주의자나 시대에 뒤떨어진 이상주의자와 함께 비현실적이거나 협상을 모르는 교조주의자쯤으로 취급되는 회색의 사회에서 <한겨레>는 <한겨레>의 원칙과 상식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러나 원칙과 상식이 불편한 것은 원칙과 상식이 오염됐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생존을 위해 원칙을 훼손하며 회색 신문이 되기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한겨레>는 적절히 오염되면서 생존하느니 차라리 옥쇄를 고려함이 마땅하다. 그것이 지금 진행 중인 ‘한겨레 제2창간운동’에 많은 구성원들이 걸고 있는 의미일 것이다. 회색의 사회를 거부하는 모든 이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다시금 빌어본다.
<한겨레>는 고통스럽더라도 ‘흰색’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hongsh@hani.co.kr 회색 도시. 콘크리트 건물과 공해로 뿌연 하늘, 한강은 아파트군에 포위당해 빛을 잃었다. 서울은 다이내믹하지 못한 사람에게 우울을 강요하는 회색의 도시다. 그 한곳에 <한겨레>가 있다. 저잣거리에서 사람 냄새를 좀처럼 맡기 어려운 것은 분명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내 우울증 탓일 것이다. 사람의 길은 자동차길에 밀려났고,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의 길’을 찾지 않듯이, 젊은이들이 <한겨레>를 별로 찾지 않는다. “부자 되세요!”는 이 사회에서 반어법이 아니다. 물질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한편,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모색과 긴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민주/반민주의 긴장이 사라진 ‘민주화된 시대’에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 성숙을 위한 모색과 긴장을 촉발하며 함께 커야 할 <한겨레>의 설 자리가 너무 좁다.
흰색은 왕따, 검은색은 마녀사냥 비인간화된 욕망은 물질과 출세를 가치 판단과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일본군 출신 독재자의 딸이 환호받을 수 있는 것은 과정이 어떻든 경제성장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회색의 사회가 받아들인 새 ‘원칙’에 의해서다. 전두환의 의리와 카리스마가 거론되는 것 역시 과정이 어떻든 출세한 자의 비범한 능력이 평가되는 새로운 ‘상식’ 때문이다. 이처럼 과정이 어떠하고, 수단과 방법이 어떠하든, 물질과 출세를 획득하는 것이 원칙이고 상식인 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성의 항체를 상실하고 물신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 빚어낸 결과다. 뿐만 아니라, 이 욕망은 사회에 팽배한 경쟁과 효율 만능주의를 더욱 부추긴다. 이윽고 구성원 상호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불가능하게 하고 구성원들이 인간 존재를 스스로 배반하는 의식과 가치관을 갖도록 한다. 이 사회의 욕망의 색인 회색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하다. 회색은 배경이 흰색일 때 검은색이 되고 검은색이 배경일 때 흰색이 된다. ‘회색인들의 회색의 사회’에서 흰색이 조직과 사회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다. 흰색은 검정은 물론 회색까지도 검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겨레>의 슬픈 자화상의 배경일 수 있다. 점잖은 꾸중으로 포장되기도 하는, <한겨레>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대개 내부 고발자나 촌지 거부 교사에 대한 왕따처럼 고발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검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이 사회의 방어본능의 반영이다.

서울은 다이내믹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울을 강요하는 회색 도시다. 그 회색 사회에선 물질과 출세를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