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간 대통령
등록 : 2001-01-02 00:00 수정 :
대통령이 ‘맛이 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국무회의를 친히 주재한 자리에서 “지금 거룩한 표정으로 앉아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정권이 바뀌고 나면 감옥에 갈 분들이 아마도 틀림없이 있을 것 같아 큰 걱정이오” 했다든가… 공동정권의 다른 한쪽인 총리는 적어도 당장은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닭갈비 같은 존재이므로 원근과 강약의 조절에 각별히 신경을 쓰되 어느 땐가 다가오게 될 비정한 파국에 대비하여 ‘필요할 만한 것들’을 잘 챙겨두라고 지시했다든가….
대통령이 ‘맛이 갔다’는 이야기에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의 글은 단지 <대통령>이란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한 것입니다. 소설가 유순하씨가 쓴 이 소설이 나온 것은 지난 98년 8월. 그러니까 이 정권이 갓 출범한 무렵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나왔을 때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회사 책상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을 오늘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온 것은 한숨이었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 그리고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이 소설에는 정말 ‘소설 같은’ 여러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우리의 꿈이 투영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국민 중심 정책’의 하나라면서 경제정의 실천을 위한 실천지침을 공표했다. ‘상식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재산은 모두 국고에 환수하여 IMF로부터 빌린 돈을 포함한 대외채무를 갚고 국내 산업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데 쓰겠다’는 것이었다”, “시인 하나를 가둬둬야 하는 정권이라면 존립 가치가 없다. 그것이 이른바 양심수를 모두 석방하기로 했다는 방침을 발표한 정부대변인의 허두였다”…. 저자가 표현한 대로 ‘호대(浩大)하고 웅혼(雄渾)한’ 여러 혁명적 조처들은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헛된 꿈으로 접은 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그리고 요즘 곳곳에서 이런 목소리마저 들려옵니다. ‘대통령이 맛이 간 것이 아닌가.’ 소설에서 경탄과 환호의 의미에서 사용한 ‘맛이 간 대통령’이 현실에서는 정말 가혹한 평가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의 한 대목은 대통령이 ‘비상한 결심’을 하기 앞선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정부나 정치권은 국민들이나 기업들에만 구조조정과 고통분담을 요구할 뿐 자신들은 오히려 구태의연하게 난장의 황음을 유유히 즐기며 실정(失政)을 되풀이하면서도 거룩한 표정으로 상투적 낙관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고, 기업은 전과 같이 세월이 어서 흘러가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노동단체들은 ‘왜 우리만인가?’라는 저돌적 반문을 기치삼아 앞장세워 주먹을 불끈불끈 내지르고 있었고, 있는 국민들이 오히려 더 좋아진 환경을 은근히 기뻐하고 있는 사이에 없는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갈급하게 몸부림치다가 더러는 냅다 제 목숨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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