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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분풀이’의 휘몰이가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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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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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귀족층 국적 포기 논란에 깔려있는 가학성
왜 군대의 인격화와 대체복무제에는 침묵하는가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물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다. 중남미 히스패닉계의 미국 원정 출산은 주로 먹고살기 어려운 하층민들의 마지막 몸부림 같은 선택이다. 한국처럼 부유층이 원정출산을 대대적으로 하고, 대학교수, 외교관, 대기업 임원 등 잘나가는 사회귀족의 자식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국적을 버리는 나라는 없다. 그렇게 약속의 땅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부모처럼 한국 땅에서 사회귀족으로 군림한다. 국민의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사회귀족으로 군림한다는 것은 분명 사회 불의이며, 정서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뻔뻔한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회귀족층의 병역 기피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심심치 않게 불거졌지만 본질에 대한 접근 없이 오직 도덕성 시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는 얘기만 거듭했을 뿐이다. 이번 국적 포기에 따른 논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솔직히 주장하듯 원정출산이나 병역을 피하기 위한 국적 포기는 능력 있는 사회귀족의 특권이다. 이 말에 그대의 속이 뒤틀릴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내 “대한민국 1%의 힘” 같은 말을 받아들였고 적어도 무의식으로는 그 1%의 능력을 선망해왔다. 이 사회는 “대한민국 1%의 힘”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말에 무감각한 사회다. 내면 지향이 아닌 타자 지향의, 그리고 물질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귀족에겐 보여줄 능력이 있는 반면, 우리에겐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이 뻔뻔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지금 그들처럼 뻔뻔하지 않은 것은 단지 내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점도 대부분의 경우 진실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군대 가고 싶어 가는 놈 나와보라고 그래” “그런데 왜 너희들만 안 가냐?” 맞는 말이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지금까지 벌어진 논란의 과정에서 “솔직히 군대 가고 싶어 가는 놈 나와보라고 그래”에 대해 따지는 경우는 없고 “왜 너희들만 안 가냐?”에만 집착한다는 점이다. 또 그럴 때마다 갑자기 애국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 땅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고 말하는 수많은 ‘나 자신’에게, 특히 젊은 그대에게 묻는다. 장차 이 땅의 ‘노블레스’가 된다면 스스로 ‘오블리주’할 것인가. 그대가 말하듯 이 땅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그 개념조차 없는데 유독 그대만 오블리주할 것인가? 왜? 그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 그대의 분노가 정당한 만큼 그대에게 던지는 이 질문 또한 정당하다. 거듭 말하지만, 사회귀족의 자식이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우리는 분노해야 하고 그 자식들이 다시 이 땅의 사회귀족이 되어 대물림으로 군림하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노한다고 이 땅에 없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갑자기 솟아나는가.

(사진/ 한겨레)

반면에, 그 분노의 절반만이라도 감옥에 갇혀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 지금도 1천명에 이르는 사회 구성원들이 갇혀 있다- 에 대한 연민의 정이나 이해심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인가. 또 이번 사태를 통해 보여준 사회적 합의의 절반만이라도 군대를 인격화하는 일에 역량을 모을 수 없는 일인가.

왜 이 땅에는 분풀이나 가학성에 비해 연민과 이해심은 부족한가. 왜 여론몰이는 하면서 지혜를 모으지 못하는가. 심지어 대학생들이 자식의 한국적을 포기하도록 한 교수를 퇴출시키겠다는 결의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풀이의 휘몰이 속에서 나는 섬뜩함을 느낀다. 여론몰이와 분풀이 속에 군사문화의 폭력성과 가학성이 결합돼 있음을 보기 때문이며, 인간 이성과 감성이 추행당했던 기억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남성성과 인성에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까라면 깐다는 군기는 인간성을 깔아뭉개면서 인간을 폭력의 도구로 만드는 명분이었다. 그렇게 잘 훈련된 군인들이 제대 뒤 시민이 되고 가장이 되고 교사, 예술가, 정치가가 된다. 우리는 군대 내무반 생활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들 몸 속에, 우리의 문화 속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다. 가령 거기서 우리가 욕하면서 당하고 당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요령’인데, 그것은 군대의 폭력성을 삶의 방식으로 포장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도록 작용한다. 폭력 앞에 한없이 나약해져야 했던 기억도, 계급 하나의 차이로 누군가에게 짓밟혔거나 누군가를 짓밟았던 기억도 자랑투의 농담거리로만 남아 있는 게 아니다. 2~3년 군대 갔다 와서 20~30년 우려먹는다는 말처럼. 피해와 가해의 기억과 함께.

한창 감성이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이라고 말하면서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는 이 땅의 중·고등학교의 풍속도는 군사정권 아래 사회 기강을 세운다며 길거리에서 벌였던 단속의 유령이 21세기에도 배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는 오늘의 군대에서도 그 유령은 인분을 먹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군대 내 인권 문제가 군 기강 차원에서 유보돼야 한다는 주장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회다. 인권이 규율과 강인함을 저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면 통제되지 않는 폭력성의 표현이다.

원정출산 보다는 군대 인격화를

민족도 없고 인격도 없는 군대라고 어느 퇴역 장군은 말했다. 그렇다면 민족도 인격도 없는 군대에서 사회 구성원에게 ‘애국’을 요구하는 모순은 국민의 의무도 하지 않으면서 사회귀족으로 군림하는 모순과 통한다.

이번 법안으로 원정출산이 없어질까? 글쎄올시다. 사회귀족은 뜨거워진 냄비가 식기를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능력을 갖고 있다. 자식의 미국 국적 취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으로 족하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말하며 이중국적 허용을 주장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경쟁력을 갖춘 인적 자원을 빼앗겨선 안 된다는 논리가 제도화로 연결되는 일이 18년이나 기다려야 되는 일일까? 그러나 나는 그 전에 모병제가 실시될 것을 기대한다.

현대의 군대는 보병 중심이 아니라 기술과 장비 중심이며, 그것은 우리가 요구하기 이전에 군대의 인격화를 요구하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사회귀족은 원정출산에 나서기보다 군대의 인격화를 앞당기는 일에 앞장서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그들의 자식이 그들처럼 사회귀족으로 군림하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군대의 인격화에 상징성을 주면서 그것을 가속화할 대체복무제 실현을 위해 나서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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