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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달력 여백에 22년 세월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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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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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의 날짜는 그저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다. 허공을 떠돌던 무의미한 숫자는 달력에 박히는 순간 소중한 하루로 바뀐다. 아직 오지 않은 날짜 하나하나에는 미래가 담겨 있고, 지나간 날짜마다 추억이 녹아 있다. 그래서 달력에 빼곡이 무언가를 적어놓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고 어제를 기억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단 하루라도 허투루 보낼 리 없다. 22년 동안 달력의 여백을 빼곡이 채워온 농부 임대규(65·충북 충주시 살미면)씨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6남매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켰고, 아직 빚져본 적 없으니 다행이지….”

임씨가 ‘달력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79년부터. 그의 서재에 보관된 22년치 달력에는 5남1녀와 손녀의 생일, 집안의 대소사부터 가축의 건강상태, 파종시기, 추수날짜까지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그날 사용한 버스 승차권, 공원과 극장 입장권도 무수하게 붙어 있다. 뿐만 아니다. 각종 행사 안내장, 청첩장, 유인물, 복권, 우표는 물론 전기료 등 각종 공과금 영수증까지 차곡차곡 모아둔 서재를 보면 그의 수집벽에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부지런히 기록하고 분석한 덕분에 이웃들은 그를 “농사 박사”라고 부른다. 해마다 배추파종은 어느 때가 좋은지, 모심기는 언제가 적당한지를 마을에서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꼬치꼬치 농사일을 물어오는 이웃들 때문에 성가실 정도란다. 최근 한국 국가기록연구원이 주최한 제1회 ‘한국 기록문화 시민전’에서 대상을 받아 그의 지독한 기록 습관은 국가적으로도 공인받았다.

임씨는 활자로만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사진찍기에도 재미를 붙여 중요한 일이 있거나, 색다른 풍경이 보일 때마다 셔터를 누른다. 19년 동안 16마리의 송아지를 안겨준 암소의 사진, 농민대회 풍경, 가족사진…. 이렇게 정리한 앨범만도 수십권에 이른다. 무엇이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카메라와 볼펜은 20년 넘게 그의 필수품이다.

임씨는 “모든 기록이 역사”라며 “그동안 모아둔 달력은 우리집 역사책”이라고 자랑한다. 올해에도 이미 여백이 넉넉한 걸로 새해 달력을 확보해 두었다는 임대규씨. 임씨 가문의 2001년 역사책에는 좋은 기록만 남기를.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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