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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듣지 못하는 세상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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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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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과 함께 작업하는 사진작가 황경희씨… “그들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련다”

(사진/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국구화학교 중3교실에서 사진작가 황경희씨가 청각장애인인 오병규씨와 양혜원씨와함께 그들의 작품을 놓고 한창 품평회를 하고 있다)
12월14일 오후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국구화(口話)학교 지하에 있는 한 교실. 세명의 남녀가 책상 위에 여러 장의 사진들을 펼쳐 놓고 한창 숙의 중이다. 주전자, 스피커, 컵, 수도꼭지, 마주 잡은 손…. 모두가 깔끔한 흑백사진들이다.

“이 건 무슨 뜻이죠.” 사진작가인 황경희(40)씨가 오병규(36)씨에게 묻는다. 황씨가 가리킨 사진은 탁자 위에 놓인 스피커를 클로즈업한 사진. 오씨의 작품이다. “?$#!…” 오씨가 황씨에게 알아듣기 힘든 말로 열심히 설명한다. 오씨는 6살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청력을 잃은 청각장애인이다.

“어릴 적부터 맘속에 똬리져 있는 청각장애인이라는 강박관념을 소리를 크게 하는 스피커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랍니다.” 황씨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기자를 향해 오씨의 말을 ‘통역’한다. 이번에는 기자가 오씨에게 직접 묻는다. “마주 꽉 잡고 있는 이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은 뭘 뜻하죠. 이 얼굴사진들은 누구인지?”

다르지 않은 청각장애인의 현실을 보아라


무표정하거나 찡그린, 때로는 깊은 사색에 잠긴 얼굴사진들…. 오씨가 기자를 보고 알 듯 모를 듯한 말과 손짓으로 이야기한다. “얼굴은 모두 잘알고 지내는 청각장애인들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청각장애인으로서 깊은 고뇌가 서려 있죠. 그걸 담아봤어요.” 사진 속의 얼굴 중에는 지금까지 묵묵히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는 양혜원(24)씨의 얼굴도 있다. “말없는 그들의 얼굴을 통해 청각장애인들도 겉으로 볼 때는 건청인(정상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오씨가 말한다”고 황씨가 전한다. 사실 오씨는 알아듣게 말을 못해도 상대방의 의사를 충분히 알아낸다.

바로 입모양 등을 통해 상대방의 말뜻을 알아채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대화기법인 구화를 일찍이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대학(단국대 사범대 특수교육과)을 나와 자신이 배운 바로 그 구화학교에서 10년째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손은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듣지 못해서 상대방에게 주로 손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청각장애인의 현실을 가리킨 것이죠.” 그동안 묵묵히 황씨와 오씨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양혜원(24)씨가 모처럼 말추렴을 한다. 내내 말이 없어 그 역시 오씨와 같은 청각장애인으로 말할 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또박또박 말한다. “보청기를 꽂고 있는데다 어릴 적부터 구화를 배워 상대방의 말을 다 알아듣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자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보통 청각장애인들과 달리 자신의 뜻을 상대방이 어느 정도로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씨는 3살 때 열병으로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그 역시 오씨처럼 지금 구화학교에서 농아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다. 비록 임시교사이긴 하지만. 양씨 앞 책상 위에도 숱한 흑백사진들이 펼쳐 있다. 그의 작품에는 특히 나무, 집, 식탁, 주방그릇 등을 담은 사진이 많다. “모두, 행복한 가정을 상징합니다. 단란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죠.” 양씨의 말이다.

무료 사진교실 열어 예술혼 심어줘

(사진/사진작가 황경희씨는 사진예술계에서 횡성사진나눔터의 운영자로 유명하다.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유동리에 있는 ‘횡성사진나눔터’는 다른 사진교실과 달리 3∼4일 합숙을 하며 집중교육을 받는 것이 특징으로 사진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사진애호가들로부터 큰 인
사진작가, 황경희씨와 청각장애인인 오병규, 양혜원씨. 이들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만난다. 바로 내년에 열 전시회 때문이다. 오병규씨와 양혜원씨를 비롯해 남일현(37), 윤나리(21), 김은진(22)씨 등 5명의 청각장애인들은 2001년 2월 서울 여의도 동양증권빌딩 안에 있는 선암미술관에서 첫 사진전을 열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데뷔전인 인 것이다.

“너무나도 그날이 기다려진다”는 이들의 전시회 제목은 ‘(手+表)²×生’. 난해한 암호 같은 이 제목에 대해 오병규씨는 “손(手)으로만 주로 의사를 표(表)현해야 하는 청각장애인의 고단한 삶(生)을 담은 것”이라고 풀이한다.

기실, 사진작가 황씨와 오병규, 양혜원씨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물론 이런 표현에 대해 황씨는 “그냥 같이 사진을 공부하는 사이일 뿐”이라고 강조하지만. 여하튼 이들의 만남은 1998년 3월 황씨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복지회관인 청음회관에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무료 사진교실을 개설하면서 비롯됐다.

“영국에서 사진예술을 공부할 때 청각장애인들이 건청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을 내놓는 걸 종종 봤죠. 그래서 적어도 사진예술 면에서는 이들이 훨씬 작품성 있는 창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귀국하면 꼭 청각장애인들과 더불어 사진작업을 하고 싶었죠.”

황씨는 자신과 청각장애인들과의 사진작업을 그래서 “장애인들을 위한 동정이나 헌신으로 보여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어디까지나 작품성 높은 사진예술을 하기 위한 의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황씨의 사진교실에 찾아온 첫 멤버가 바로 오병규씨 등 20여명. 황씨의 생각대로 이들 청각장애인들은 건청인보다 빨리 사진을 습득했고, 특히 관찰력과 구성력이 예리했다.

“사실, 사진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를 때, 자기 호흡소리조차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아요. 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은 그야말로 아무런 소리없는 절대침묵의 상태에서 셔터를 누릅니다. 이런 면에서 청각장애인들은 사진작업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황씨는 예상밖의 큰 소득도 거뒀다. 바로 “사진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자신의 맘속의 응어리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사진작업을 하면서 맘이 확 풀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장애인으로 특별히 무시당해서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정상적으로 하고 싶은 걸 맘대로 못한 게 늘 가슴아팠어요. 그래서 뭔가를 표현하고 싶었는 데…. 하지만 사진으로 이제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병규씨의 말이다.

이 점에서는 양혜원씨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는 1남2녀 중 장녀로 부모의 이혼과 동생들의 학교중퇴 등으로 어린 나이에 많은 인생고를 겪었다. “혼란스러웠어요. 특히 부모님이 이혼한 뒤로 세상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찼어요. 그러다 99년 9월부터 황 선생님한테 사진을 배웠는데, 사진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하면서 혼자가 아니란 것도 알게 됐고요. 이제는 제곁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오씨와 양씨 등 청각장애인들은 자신의 맘속에 갇혀있던 세상을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 새롭게 그리고 있다. 황씨는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격주에 1번씩 청음회관에서 사진이론을 공부한다. 또 다른 격주에는 황씨가 운영하는 사진워크숍 전문교육원인 ‘횡성사진나눔터’에서 실습을 한다.

황씨는 사실 이 횡성사진나눔터 운영자로 사진예술계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유동리에 있는 ‘횡성사진나눔터’는 다른 사진교실과 달리 3∼4일 합숙을 하며 집중교육을 받는 것이 특징인데, 사진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사진애호가들의 배움터이자 토론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는 곳이다.

“청각장애인들에게 사진을 가르칠 때 늘 강조합니다.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라. 남들 다 찍는 사진, 그럴듯한 풍경은 의미없다. 바로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그게 훌륭한 사진예술이다….” 이는 황씨 자신의 사진예술관이기도 하다.

전시회 불가능하게 됐지만 포기는 없어

카피라이터 등 사회생활을 하다 사진작가의 꿈을 위해 지난 90년 홀연히 영국으로 유학한 늦깎이 사진작가인 황씨는 96년 귀국해 그해, 삼성포토갤러리에서 ‘나를 찾아서’란 이름의 사진전을 통해 사진예술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의 화두도 바로 “자신의 자아”이다.

본의 아닌 운명의 상처로 맘을 닫아놓고 있는 청각장애인들에게 이처럼 자아를 인식하게 하고 나름의 예술적 성취를 일구게 한 황경희씨. 그는 5명의 청각장애인들의 사진전은 자신의 사진전보다 더 크나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의 순수한 의도가 뜻밖에 벽에 부닥쳤다. 인터뷰를 마친 이틀 뒤인 지난 12월16일 황씨가 급히 전화를 해왔다.

선암미술관에서 열기로 한 전시회가 취소됐다는 것이다. 즉 이 미술관이 들어 있는 빌딩이 다른 기업에 팔려버려 전시회 자체가 불가능하게 됐다는 선암미술관쪽의 통보를 이날 아침에 받았다는 전갈이었다. 전시회 팸플릿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까를 두고 고민하던 그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무려 2년전부터 꿈꿔 온 희망의 사진전인데, 어떻게든 사진전을 꼭 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황씨의 목소리는 어느덧 젖어 있었다.

이창곤 기자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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