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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픔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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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1-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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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겨울의 길목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매서운 추위와 황량함의 상징인 시베리아 벌판을 떠올리곤 한다. 왠지 겨우내 삶이 회색빛에 둘러싸여 힘겹기만 하고 좀처럼 돌파구를 찾기 어려울 것 같은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일 것이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등장하는 수용소가 시베리아쯤일 것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어두운 모습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런 느낌에 빠져든다. 벌써부터 봄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사진 / 류우종 기자)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날씨 탓인지 정치권과 정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를 몹시 힘겹게 한다. 늘 그러려니 하다가도 사사건건 대치와 파행을 일삼는 국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답답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새해에는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각종 법률안 심의와 새해 예산안 처리에 열정을 쏟는 국회의 모습을 보고 싶었건만 역시 무리였던 것 같다. 노동3권 완전보장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들어간 공무원노조와 정부가 강경하게 맞서고 있는 모습 또한 정치권 못지않게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이 겨울을 견뎌내는 데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은 소식이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로부터 들려온 것은 분명 행운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노 대통령이 동포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경제 양극화’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고, 이에 앞서 이미 청와대가 이를 해결할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가동에 들어갔음을 <한겨레21>이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 그것이다. 참여정부 경제정책 기조에 일대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어서 그 파장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격차,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 및 임금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희망적이다. 양극화 문제가 어제오늘의 이슈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분배를 통해 적극적인 해결에 나서면서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가동하겠다고 하니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다.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했다는 평가를 받아온 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이 어떤 모습으로 선명성을 드러낼지도 관심거리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양극에 서 있는 당사자들이 이번 정책에 공감하는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일 것이다. 고소득층이, 대기업이, 정규직이 분배를 위한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저항한다면 그동안의 여러 정책에서 보았듯이 시작부터 어려움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소득층이, 중소기업이, 비정규직이 정부 조처가 기대에 못 미치고 전시행정에 불과하다며 실망하게 된다면 의도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고소득층과 대기업, 정규직에게는 양극화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저소득층과 중소기업, 비정규직에게는 양극화의 분노를 삭이려는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노 대통령은 틈만 나면 “성장과 분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면서 카를로스 메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의 ‘변신’을 사례로 들곤 한다. 이제 노 대통령은 양극을 설득해 경제 양극화의 난맥상을 바로잡아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설득에 실패할 경우 노 대통령은 스포츠 경기의 심판이 동전을 던져 코트를 결정해주듯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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