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대안운동을 찾아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촌부’들이 영화제를 개최하던 날
▣ 부안= 글 · 사진 김타균/ 녹색연합 국장 greenpower@greenkorea.org
8월12일 오후 새만금과 핵폐기장 반대 투쟁을 거치면서 환경운동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전북 부안을 다시 찾았다. 부안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해 지난해 생업을 팽개치며 투쟁을 벌여왔던 부안 사람들. ‘자치학교’를 만들고, ‘부안새만금생명평화모임’을 재출범시키고, ‘부안독립신문’을 준비하는 등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부안영화제’라는 또 하나의 선물 보따리를 준비했다.
주민 얼굴 사진전도 함께 열려
거리 곳곳에 현수막과 대형 포스터가 붙여져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킬 만도 한데 곳곳에 노란 반핵 깃발만이 내걸려 있다. 깃발 속의 메시지가 달라졌을 뿐이다. ‘반핵’이라는 말 대신에 ‘핵종규 퇴진’을 요구하는 메시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김종규 부안군수의 퇴진을 요구하는 노란 깃발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상영 장소인 부안동초등학교 강당 앞. 행사를 준비한 주민들이 영화제를 보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사람들을 정성껏 맞이하고 있었다. 행사장 입구에는 자원봉사를 자청한 청소년과 주민들이 곳곳에서 안내와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부안여고 2학년인 강수진양은 “영상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부안에 영화제가 생겼다는 게 무엇보다 기쁘다”며 “환경과 생명이 어우러진 영화가 되어 부안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영화 상영에는 난관이 많았다. 애초 염두에 두었던 부안예술회관 사용을 군청이 불허했기 때문이다. 2층 난간에서 내린 하얀 천이 스크린을 대신했고, 빛을 막을 커튼도 부족했다. 마룻바닥에 놓인 철제 의자가 관람석이었다. 이곳을 찾는 주민들은 애당초 질 높은 서비스를 기대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러나 매회 100여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영화를 즐겼다.
지난해 반핵 투쟁의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하며 옷장 속에 묵혀뒀던 노란색 티셔츠를 꺼내 입고 찾아온 주민들, 도시에서 온 외손자들을 이끌고 온 어르신네, 부안을 기억하는 전국 각지에서 온 시민운동가들,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높은 영화 마니아들도 함께했다. 지난해 3월28일부터 65일 동안 진행된 309km 삼보일배 대장정을 다룬 오종환 감독의 <길 위에서 길을 묻다>, 대안에너지의 가능성을 모색한 황윤 감독의 <시민태양발전소, 발전을 시작하다>, 최소한의 모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 철도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한 박정숙 감독의 <소금> 등의 작품이 연이어 상영됐다. <길 위에서~>가 상영될 때 일부 주민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영화 상영 뒤 감독들이 올라와 주민들과 질의응답을 벌였다. 애써 폼을 잡는 감독도, 분석하듯 질문하는 관객도 없었지만, 부안의 고민을 진솔하게 풀어낸 작품들을 놓고 소박한 토론이 이어졌다.
해가 지자 영화관은 야외로 옮겨졌다. 저녁 8시 ‘반핵민주광장’으로 불리는 수협 앞 광장에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영화 상영 전에 펼쳐진 문화행사는 주민잔치의 연속이자 또 한편의 영화였다. ‘부안군민 가수’로 통하는 김병국씨의 통기타 연주는 참가자들의 여흥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무대에 오른 김인경 범부안핵반대대책위 공동대표(원불교 교무)는 “집행부에서 가수 주현미를 섭외하기로 했는데 잘 안 된 것 같아 내가 노래를 부르겠다”며 <짝사랑>을 열창했다. “부안군민 여러분 가슴에 별이 되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자 주민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광장 주변에는 주민 얼굴 사진전도 열렸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네까지 각양각색의 표정과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옷차림은 달라도 ‘핵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표정만은 같았다. “어이 쌀집 할매는 어디 있나?” “이쪽 어디에서 본 것 같은디?” “우리 아들 주현이가 여기에 있네!” 주민들은 수백장의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며 자신 또는 이웃의 모습을 찾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시위에 참여했다는 박양선(67)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뒤 끝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 뭐라고 말할까. 마음이 이상하다.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손자들에게는 좀더 좋은 세상을 보여줘야지.”
500여명이 넘는 관객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더위가 채 식지 않은 아스팔트 위에 앉은 주민들은 진지하게 영상에 몰두했다. 김인경 공동대표는 개회사에서 “반핵과 민주주의를 일궈낸 지난 13개월간의 투쟁이 승리를 앞둔 상황에서 위대한 축제의 자리를 마련해 기쁘다”며 “영화제를 통해 부안의 문화적 역량을 알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자”고 영화제 취지를 밝혔다.
영상을 토대로 공감대를 쌓았다
부안영화제에는 자본의 힘으로 만들어진 잘빠진 영화들 대신 힘없는 부안 사람들이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만든, 거칠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들이 있다. 그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싸움 속에서 영상의 힘을 깨달은 것이다. 지난해 주민들은 수백편도 넘는 핵 관련 영상물을 보았고, 이를 토대로 서로 공감대를 쌓았다. 영상은 싸움을 정리해 음미하도록 했고 다시 분노케 했으며, 결국 사람들을 뭉치게 했다. 영화조직위에서는 영화제 두달 전부터 ‘카메라를 든 부안 주민’이라는 미디어교육 강좌를 열어 ‘영상을 통한 참여 민주주의’ 실험을 펼치기도 했다. 이들 주민은 짧은 영상작품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도 생겼다. <환경미화원의 휴일> <어울림, 유기농을 하는 사람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 등은 모두 주민 작품이다.
풀뿌리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부안 주민들. 이제는 작은 시골마을의 관객이 되어 ‘시네마 천국’을 만들어냈다. 영화 한편 보기 위해 정읍이나 전주까지 나가야 했다는 부안에서 이렇게 거칠지만 감동적인 영화제까지 열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핵폐기장 투쟁 과정에서 얻은 성과 덕분이다. 영화제 기간 동안에 만난 주민들은 지난 촛불집회에서 키운 자발적 참여의식이 부안만의 독특한 ‘생명문화’와 ’문화적 자산’을 싹트게 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부안영화제에는 열악한 시설에도 매회 100여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몰려와 영화를 즐겼다. 영상은 부안 주민들의 무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