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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간이역’님께 이 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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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8-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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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대안운동을 찾아서]

매년 자연에 풀꽃상을 바치는 ‘풀꽃세상’… 느린 삶을 생각하는 ‘풀씨’들의 자발적 활동

▣ 글 · 사진 김타균/ 녹색연합 국장 greenpower@greenkorea.org

“간이역은 오랫동안 이 땅의 이름 없는 장삼이사들을 이리저리 실어나르던 달구지 같은 완행열차 정류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망할 속도 중독증의 미친 세월을 만나, 이 땅의 아름답고 한가로운 간이역은 다 떨어진 고무신짝처럼 버려지고 허물어지고 잊혀져 내동댕이쳐지고 있습니다. 고속전철이라는 말썽 많은 괴물이 나타나 멀쩡한 산이 뚫리고 없어도 되는 다리가 생기고, 우리 산하의 핏줄이 끊기고 그곳에 살던 생명체들이 절단나고 있습니다.”


‘풀꽃세상’은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물에게 ‘풀꽃상’을 드리고 있다. 올해 풀꽃상은 간이역이 받았다.

영화방, 산행방, 책읽기방…

환경단체인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하 ‘풀꽃세상’·www.fulssi.or.kr)이 간이역을 올해의 풀꽃상 수상자로 선정해 발표하면서 밝힌 선정 이유다. 최근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서는 풀꽃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 상은 ‘주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존경심을 회복하자면 말투부터 바꾸자는 뜻이라고 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니 사람을 대하듯이 자연을 대하는 것이 옳다는 뜻도 있다.

이번 풀꽃상의 메시지는 “간이역은 파국을 향해 치달리는 우리 시대의 눈물”이다. 풀꽃세상은 간이역과 더불어 30여년을 간이역에서 근무한 강원도 별어곡역의 장영선 역무원, 다큐멘터리 영화 <곡선>을 만든 부산문학예술공동체 영상패 ‘숨’,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관통터널 반대운동을 벌이며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하고 있는 내원사 지율 스님에게 간이역을 대신해 부상을 주었다.

풀꽃세상은 사람이 아니라, 새나 돌에게 상을 주는 일을 6년째 해오고 있다. 1999년 봄 ‘동강의 비오리’를 시작으로 보길도의 갯돌, 가을억새, 인사동 골목길, 새만금 갯벌의 백합, 지리산의 물봉선, 지렁이, 자전거, 논 등이 풀꽃상을 받았다.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풀꽃상’은 환경 문제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법이다. 모임이 정작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은 풀꽃상 배후에 깔려 있는 메시지라 할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는 뜻과 함께 풀꽃세상의 생각이 널리 퍼지라는 의미로, 이곳에서는 회원을 ‘풀씨’라고 부른다. ‘풀씨’들은 스스로 자연 이름을 붙여서 이름 대신 서로 부른다. 이름짓기를 어려워하는 풀씨들을 위한 작명소도 홈페이지에 차려져 있다.

부상 수상자의 소감 발표에 이어 참가자가 모두 수상자와 일일이 축하와 격려의 인사를 나눈다. 오영숙 수녀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완행열차 비둘기호가 없어지고 통일호도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만큼 빠르면 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이만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강한 힘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각자 작은 몫을 하자.”

지난해 시상식에서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운동’으로 부상을 받았다가 ‘풀씨’가 되었다는 김새한(14·꿈사랑풀)씨는 “이번에 비무장지대를 추천했지만 간이역이 된 것도 좋다”면서 “간이역은 마을 사람들을 소통시켜주는 구실을 하는데, 돈을 적게 들이겠다고 간이역을 없애는 것은 소통을 끊는 것”이라고 말했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 떡도 돌리고 물도 나눠 마시면서 문화공연, 잔치마당이 이어진다. ‘도롱뇽 송’도 자연스럽게 터져나온다. “천성산에~ 도롱뇽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쏘옥~ 앞다리가 쏘옥~.” 기차놀이도 하고 소리도 질러본다. 시상식은 천성산 살리기 서명운동으로 마무리됐다. 천성산의 생명을 앗아가는 대가로 사람들이 얻는 것은 22분의 시간 단축이다. 풀꽃세상은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속도 중독증을 상징하는 고속철도가 멀쩡한 산을 뚫고 없어도 되는 다리를 놓으며, 우리 산하의 핏줄을 끊고 생명체들을 절단내고 있다”고 밝혀 간이역 선정이 속도에 대한 물신숭배의 상징인 고속철도를 겨냥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저녁 무렵 서울 아현동의 풀꽃방. 10여명의 풀씨들이 모여 부상 수상자인 영상패 ‘숨’의 영화 <곡선>을 감상했다. 고속철도와 환경파괴에 대해 취재하던 학생이 “느림보다 빠름이 우월하고 고속철이 절대선인 세상에서 속도에 대한 맹종으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내용이다. 사무실에는 DVD플레이어와 빔프로젝터까지 완비되어 있다. 알고 보니 풀씨들의 모임인 ‘영화방’이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누는 장소가 바로 풀꽃방이었다. 내일은 ‘산행방’ 풀씨 30여명이 일산에 있는 정발산에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필자를 충동질했다. 해발 3천cm라며 너스레를 떤다. ‘책읽기방’도 활발한 활동을 한단다.

마음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풀꽃세상에는 여느 시민사회단체들과는 달리 단체 대표와 사무국 식구를 빼고는 임원이 없다. 운영위원회 또는 집행위원회 구실을 하는 ‘열린울타리 회의’가 한달에 한번 열릴 뿐이다. 그런데 이 회의도 참석자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풀씨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결정이나 집행도 모두 풀씨가 해야 한다. 홈페이지가 활성화돼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풀꽃세상은 회원 가입 권유도 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가입이라 회원 수가 들쭉날쭉하지 않는다. 현재 회원 수는 3400명.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는 것도 이곳의 활동방식이다.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는 성명서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렇지만 환경 현안에는 해당 지역 주민들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적극 대응한다.

이런 방식을 강조하는 것은 법·제도가 바뀌어도 개개인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소수 활동가들이 새만금 공사를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새만금’ 공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체의 규모가 커지고, 현장성이 떨어지고, 회원과 단절되고, 전문가 집단으로 변하는 것을 경계한다. 이재용 사무국장은 “오래된 생활양식에 스스로 의문을 던지게 하고, 없더라도 더불어 살고 느리게 가는 삶의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씩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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