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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민주의 열정을 기업에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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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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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기업풍토 조성하는 민주기업가회의… 경영의 모범을 만들려는 야심찬 포부

(사진/운동권 출신 기업가들이 새로운 기업모델을 만들기 위해 뜻을 모았다. 사진은 지난 11월28일 열린 민주기업가회의 창립총회모습.맨 중앙이 회장을 맡은 이래경 호이트한국 대표)
“그냥 소박하게 기본을 지켜가며 기업경영을 해나가자는 것인데… 이거, 부담스럽네요, 허허.”

서울 충정로2가 골든타워오피스텔 17층에서 만난 이래경 민주기업가회의 회장(호이트한국 사장)은 너무 과한 기대는 부담스럽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구호를 내걸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기업인들인 만큼 맡은 사업을 제대로 해나가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물론 많고 많은 단체, 헤아리기도 어려운 모임에 숫자 하나를 더 보태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지난 11월28일 오후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출범 깃발을 내건 민주기업가회의는 초기부터 언론을 비롯한 외부의 높은 관심을 끌었다. 이번 모임의 주축이 1970∼80년대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제적당하거나 투옥됐던 경험이 있는 기업인들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일부 벤처기업인들의 부도덕한 일탈 행위가 ‘깨끗한 과거’를 가진 이들의 이번 모임을 반사적으로 더욱 돋보이게 한 측면도 있다. 여기에는 혼탁한 기업환경에서 해독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외부의 기대감이 덧붙고 있음은 물론이다.


기업경영의 기본을 세우려는 마음으로…

이 회장을 비롯해 이번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현재 70여명이며 조만간 100명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지금은 서울대 운동권 출신 기업인들로 이뤄져 있지만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는 문호를 활짝 열어 외연을 넓혀나갈 예정이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과거의 정치적 행적’보다는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의 경제적 좌표’가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모임 이름을 ‘…연합회’로 하지 않고 굳이 ‘…회의’로 한 것도 이런 여지를 둔 것이다.

민주기업가회의의 출발은 지난 6월로 거슬러올라간다. 70년대 유신체제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서울대 운동권 출신들의 친목단체인 관악민주포럼의 저녁 모임에서 기업인들간의 네트워크를 결성하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 게 발단이었다. 처음에는 특정학번 동기들의 친목모임 정도로 발의됐으나 범위를 넓히고, 모임의 성격도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니라 혼탁한 기업환경을 개선하는 데 일조하는 사회적인 의미를 띠도록 하자는 쪽으로 발전했다.

회장을 맡은 이래경씨는 서울대 공대 73학번으로 고 김상진 추모집회를 주모했다가 제적되는 등 두번씩이나 학교를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 부품소재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겠다는 공대 출신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78년 군제대 뒤 아남산업, 영동개발그룹 등에 잠깐 몸담았으며 이후 오퍼상 등을 하다 지금은 독일 기계회사 호이트와 합작한 무역회사 호이트한국 대표로 일하고 있다.

시작단계부터 모임을 줄곧 준비해온 양춘승 지환테크 사장의 행적에도 사연이 많다. 서울대 경제학과 74학번인 양 사장 역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두번이나 제적당하는 우여곡절 끝에 10년 만에야 졸업했다. 양 사장은 졸업 뒤 이스라엘계 해운회사의 한국대리점인 우성해운에 입사해 18년 근무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전 회사를 그만두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 전문회사인 지환테크를 창업해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운동권 출신 기업인들이라고 해서 뭐 유별난 게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모임인 민주기업가회의도 그렇고 그런 단체 중 하나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사실, 경제난국을 맞아 이들이 꾸려가고 있는 기업이라고 해서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데서 예외는 아니다. 기업의 계속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하루하루 살얼음을 밟고 있는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사업하기 참 힘들어요. 벤처기업들로선 펀딩(자금조달)했다는 자체가 대성공이란 말이 돌 정도로 힘든 형편입니다. 어렵사리 펀딩해놨던 것들도 90% 이상 취소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습콘텐츠 및 전자화폐 인터넷회사인 인포허브 이종일 사장의 하소연이다(이 사장은 이번 모임의 막내급인 서울대 법대 84학번으로 민주기업가회의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투명한 경영 통해 자발성 이끌어내

(사진/민주기업가회의 회원들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경영철학으로 삼고 있다.산업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큐빅테크 사무실 모습)
그렇다면 이들 운동권 출신 기업인 및 이들이 꾸려가고 있는 기업들의 차별성은 없는 것일까.

싹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평소의 열정을 사업으로 이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기업을 꾸리는 등 나름대로 시도를 하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최민 국민대창업보육센터 알고리즘연구소장(서울대 자연대 78학번), 김부섭 큐빅테크 사장(서울대 공대 74학번)을 그런 예로 꼽을 수 있다.

최민 소장은 80년대 중반 운동권의 양대축인 이른바 PD, NL간의 이론적 다툼에서 PD쪽의 핵심 이론가였다. 그 자신이 장애인이기도 한 최 소장은 장애자협회 임원, 서울시 시정개발 자문위원 등을 통해 장애인을 위한 활동에 열의를 보이고 있으며 이를 기업활동으로도 연결시키고 있다. 장애인 자활공동체인 ‘도우미’를 꾸려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도우미는 서울 계동, 경기도 김포에 각각 사무소와 공장을 두고 있으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인 ‘철·알루미늄제 경사로’를 제작, 공급하고 있다. 김포공장 직원, 계동 사무소 영업사원 등을 합해 모두 10명 정도가 일하고 있으며 최 소장은 자금계획 등 전략적인 일을 도맡고 있다.

최 소장은 “도우미는 아직 개인사업체 형태이고 규모도 작아 보잘것없지만 플라스틱제 경사로를 개발하는 등 영역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아이덴티티(정체성)는 이거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고 새로운 (기업)상을 정립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부섭 사장은 79년 ‘남민전 사건’의 핵심(중앙위원)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 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큐빅테크는 국내에선 독보적인 산업용 자동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는 업체로 지난해부터 수출도 하고 있다.

김 사장의 큐빅테크는 월단위로 기업경영 상태를 상세히 밝혀 전체 임직원이 정보를 공유토록 하고 있다. 또 사소한 결정이라도 전체 직원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안이라면 전체회의를 통해 최종 결정을 내리며 이를 위해 사내 전자게시판에 미리 사안을 공지해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직원들의 자율성, 자발성이 발휘된다는 설명이다.

“소프트웨어 개발하는 일 자체가 옆에서 감독하고 지시한다고 될 일이겠습니까. 옆에서 봐도 뭘 하는지를 모르는데…. 민주기업가회의라는 공동의 장을 통해 이런 경영방식을 정형화시키는 고민을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김부섭 사장)

이런 일부의 싹에도 불구, 전반적으로는 새로운 기업 모델을 구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운동권 출신 사장들인 만큼 노조에 대한 인식도 남다르지만 머릿속의 인식에 머물고 있을 뿐 현장에서 크게 다른 모습을 아직은 찾기 어렵다. 사업을 시작해 겨우 기반을 잡은 처지에서 수익모델을 창출하는 일이 우선 급한 탓이기도 하다.

민주기업가회의의 기치가 아직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외부의 관심을 끈 요인인, 과거의 화려한 정치적 행적이 정작 앞으로 해나갈 일에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스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부의 기대가 큰 만큼 민주기업가회의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으나 당장은 ‘서울대 출신, 운동권’이란 딱지를 벗는 일이 꼽힌다. 이를 위해선 ‘민주’ ‘기업가’에 걸맞은 이들이라면 회원으로 적극 편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 내부적으로도 이런 인식은 이미 확산돼 있다.

민주기업가회의가 회원 자격을 ‘이 모임에 뜻을 같이하는 기업인’으로 넓혀놓고 있는데다 외부의 반응도 좋아 외연을 확대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진짜 고민은 외연 확대에서 나아가 모임의 취지를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대목일 터이다.

혼탁한 기업환경의 해독제 될 건가

(사진/지환테크의 인천공장 쓰레기 처리시설)
법무법인 해오름의 오세중 변리사(서울대 문리대 76학번)는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해서 이윤을 올리고 사회발전에 이바지해야 하는데 현실에선 부도덕하고 편법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며 “민주기업가회의 활동을 통해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의 모범을 보인다면 다소나마 개선되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현재 전철 4호선 삼각지역 근방인 한강로2가 한성빌딩 관악민주포럼 사무실에 임시 거처하고 있는 민주기업가회의는 조만간 여의도 한전빌딩에 사무국을 마련한 뒤 본격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해마다 10월에 정기총회를 여는 것 외에 경영환경 개선을 위한 대정부 청원활동을 펴고 참여연대 등 다른 단체와 연대하는 계획도 구상하고 있다.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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