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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백기완의 젊은 날을 들어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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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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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긴 다 틀린 껍줄(껍질)만 남기고 모두들 어디 갔느냐”며 백기완(67)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젊은이들을 향해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1982년 처음 발간된 시집 <젊은 날>을 다시 찍은 것이다.

그가 <젊은 날>을 다시 부르게 된 건 순전히 한 젊은이의 희생 덕분이다. 서울 용산구청 말단공무원으로 있으면서 공무원 노조 결성을 추진하다 쫓겨난 이승찬씨가 연구소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봉투를 들이민 것이 발단이었다. 다시 돌려주려 해도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백 소장은 이 고마운 돈을 이미 절판된 자신의 시집 <젊은 날>을 다시 찍어, 어려운 시절 같이 고생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데 쓰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통일문제연구소를 돕고자 보내온 유재영씨의 성금, 그리고 함세웅 신부와 명진 스님이 보내준 정재(淨財)를 보탰다. 그렇게 해서 <젊은 날>이 다시 세상볕을 보게 된 것이다.

“시라는 게 뭐냐,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배겨낼 수 없는 게 시 아니오? 입으로 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들, 그게 바로 내 시가 되었소.” <젊은 날>의 첫 번째 시 ‘하나부터 다시 세자’는 그런 시다.“하나를 세고/ 둘을 세고/ 백을 세고/ 만을 세고/ 천만번 거퍼 세도// 한평생 얼어붙는/ 분단의 사슬 군바리 독재// 그래도 세자/ 세다가 일생을 다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부터 다시 세자.”

고문을 받으면서 고통을 참기 위해 하나부터 무한까지 세고 또 세던 경험을 시로 옮긴 것이다. 이외에도 그 유명한 “산 자여 따르라”는 시구가 들어 있는 ‘묏 비나리’ 등 시대와 호흡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난달 북한을 방문해서 누님을 만난 백 소장은, 그 때문인지 건강이 훨씬 나아졌단다. 가슴에 맺힌 것이 풀린 것 같다고 한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헤어질 때 드라마에서처럼 우는 게 아니오. 그저 주체하지 못하고 우는 거더라고.” 을밀대로, 대동강으로, 평양의 경관을 가득 눈에 담고 온 백 소장은 대동강물이 하도 맑아 비누를 쓰지 않고 왔다고 덧붙인다. 외려 “대동강 푸른 물은 언제 다 마를까, 해마다 저 강물에 눈물 더 보태네”라는 정지상의 시구처럼 대동강에 눈물을 보태 물 맑히고 왔는지도 모른다.

보태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눈물은 <젊은 날>에서 강을 이룬다. “정말 통일이 되면 딱 한 가지 할 게 또 있구나/ 저 눈물의 강물에 배를 띄우고/ 그 기가 막힌 눈물의 사연 고향을 찾아/ 마음껏 목을 놓아 꺼이꺼이 대성통곡 한번 했으면/ 사십년 원한이 한껏 풀릴 것만 같구나.”(‘통일이 된다면’ 중에서)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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