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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냉전의 그늘, 대만/ 이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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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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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서강대 교수 · 중국문학

대만이 사실상 내전 상태다. 대만 언론의 보도를 보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대만 사회가 철저히 둘로 양분되어 심각한 대립을 이루고 있고 대만인들이 극도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놓여 있다. 재검표가 끝나고 총통 선거 국면이 어쨌거나 종결된다고 하더라도 12월에 다시 총선이 있다.

‘베이징 국어’와 ‘민난어’의 충돌

이 혼란은 표면적으로 보면 렌잔을 대표로 한 야당 통일파와 천수이볜으로 상징되는 여당 독립파의 정치적 대립 때문이다. 하지만 대만 사회는 정치를 넘어 이미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언어적 차원에서 전혀 이질적인 두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다. 재검표가 실시되고 정치적 차원에서 혼란이 수습되더라도 쉽사리 해결될 성질의 분열이 아닌 것이다.

총통 선거가 끝난 다음날 천수이볜은 당선 소감을 발표했는데, ‘국어’가 아니라 ‘민난어’로 했다.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패해 대만으로 간 뒤 국민당 정부는 대만 원주민의 언어인 민난어를 폐기하고 베이징 국어를 표준어로 강요했다. 민난어에서 국어로의 전환은 단순히 언어의 전환만이 아니라 이후 세대간·종족간 문화 충돌과 차이의 기원이 됐다. 베이징 국어는 대륙 출신의 외성인(外省人)을 대륙과 연결해주면서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창출하는 기제였고 국민당 정권과 반공, 권력, 계급적인 부의 상징이었다. 그 베이징 국어의 지배 속에서 원래부터 대만에 거주했던 본성인(本省人)들의 민난어는 억압당한 채 침묵의 언어가 됐다. 베이징 국어의 지배는 대만 사회를 지배해온 냉전적 억압의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이제 천수이볜은 대만인들에게 민난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민난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신의 승리를 정치적·문화적 차원에서 민난어의 복권, 본성인의 승리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천수이볜 정권의 탄생은 베이징 국어의 지배로 상징되는 대만의 냉전적 억압에 균열을 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천수이볜 정권의 성과는 거기까지였다. 계속되는 경제불황과 갈수록 확대되는 중국 대륙과의 교류, 이번 총통 선거에서도 패할 경우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붕괴될 것으로 판단한 보수 야당의 대연합 등의 악조건 속에서 천수이볜의 승부수는 민난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통일과 대만 독립,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성적(省籍) 모순을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하면서 총통 선거와 대만 독립과 관련한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총통 선거는 다른 모든 쟁점들이 사장된 채 통일과 독립이라는 문제로 뒤덮여버렸고, 대만인들은 철저하게 양분됐다. 이번 총통 선거가 대만 사회에 잠복돼 있던 분열과 대립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강화한 계기가 된 것이다. 민난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대만의 냉전적 억압 구조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가져오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 그것이 이제 천수이볜 정권을 위한 정치 동원의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대만인들은 그런 전면 대립 속에서도 대만 독립과 관련한 국민투표안은 부결했다. 대만 민중들의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통일·독립의 문제를 선거 쟁점으로 내거는 것이 대만 민중들 대다수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대만 정치 엘리트들의 정략적 산물임이 입증된 셈이다. 대만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만 민주세력들이 눈여겨볼 대목이 이 점일 것이다. 천수이볜 정권은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정권이기도 하지만 민주화 정권이기도 하다. 그럴 때 대만 민주세력들이 현재 대만 사회를 지배하는 통일·독립과 관련한 성적 모순의 대립 구도를 탈식민과 탈냉전, 민주화를 위한 구도로 전환하는 대분발이 절박해 보인다.

갈등 구조가 유사한 한국이 봐야 할 것

대만 사회가 직면한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성적 갈등은 근본적으로 동아시아 식민주의와 냉전주의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대만과 한국 사회가 현재 직면한 내부 갈등은 많이 닮아 있다. 대만과 한국이 1980년대 말 동아시아 민주화의 주역이 됐듯이, 이제 또다시 한 걸음 전진하여 동아시아 냉전주의의 산물인 반공과 지역주의, 종족주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민주화를 역전 불가의 대세로 정착할 수 있느냐는 기로에 같이 서 있다. 두 나라 민주세력들이 상대국의 현실을 주의 깊게 참조하면서 자국의 민주화와 동북아 탈냉전·탈식민의 새로운 시대를 위해 연대하고 지혜를 나누는 일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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