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위축되는 희귀병에도 수학교재를 집필한 집념의 수학자 임해호씨의 삶과 꿈
울산= 글 · 사진 김미영/ <인터넷 한겨레> 기자 kimmy@news.hani.co.kr
“우리나라에서도 천재적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을 닮은 스타 학자가 나올 수 있을까.”
스티븐 호킹 박사가 앓고 있는 루게릭병과 비슷한 ‘진행성 근이영양증’을 이겨내고 교재를 집필한 집념의 수학자. 그는 ‘풍산(바람산)자’로 통한다. 임해호(36)씨와의 첫 대면은 그의 삶을 짓눌러온 병마만큼 고되고 힘들었다. 울산 현대중공업 부근의 한 아파트에서 그를 만났다. 근육이 서서히 위축되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그가 휠체어 없이는 집 밖에 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지만 그는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채운 마음의 벽만은 열지 않았다. 지난 16년간 그에게 있어 휠체어는 그 자체의 의미를 넘어 세상과의 끈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자 소중한 친구였다.
술을 끊고 자신을 공개하다 풍산자로만 알려진 유명 수학강사이자 수학자가 서른여섯 번째 생일인 지난 2월1일 자신의 홈페이지(www.baramsan.com)에 실명을 공개했다. 그가 10여년간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임해호’라는 이름을 공개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세상과 쌓은 담을 허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사실 풍산자라는 필명은 수학강사로, 수학교재 집필가로 ‘업계’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개인생활은 오랫동안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잇따라 <풍산자 수학>이 출간됐을 때만 해도 그는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하지만 숨기면 숨길수록 그의 생활은 세상과 단절됐고, 인간관계도 하나둘씩 떨어져나갔다. 그의 외로움을 달래준 건 날마다 마시던 소주 1병과 담배, 인터넷, 텔레비전이 전부였다. “술은 올해 1월부터 끊었어요. 하지만 술을 마신 뒤 외로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죠. 불안과 초조함은 더욱 커졌고요.” 그는 금주 선언과 실명 공개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을 떼는 계기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포항공대 수학과 대학원을 마친 뒤 울산에 정착한 1996년부터 가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으니, 은둔생활 꼭 8년 만에 내린 결단이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장 빈도가 높은 유전성 질환으로 근육이 점차 위축되는 ‘진행성 근이영양증’ 진단을 받고도 밝은 성격과 적극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혹독한 외로움과 좌절을 딛고 “어릴 때부터 장애인이 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오기가 생겼죠. 친구들과 싸울 때는 무조건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고, 대학 때도 제 힘으로 등록금과 용돈을 마련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는 석달간 전국일주를 하기도 했고요.” 그런 그가 세상과 단절된 계기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울산으로의 이주, 악화되는 병세 때문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어머니는 그 존재만으로도 삶의 원동력이었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는 이후 두번이나 휴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 그는 1996년 박사과정 진학도 포기하고 형이 있는 울산에 정착했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큰 소용돌이로 작용했다. 친구들도 결혼과 취업 등으로 학교를 떠났고, 그들처럼 평범한 가정과 일을 가질 수 없는 자신이 비참해졌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자신과 달리 나름대로 인생을 설계하며 행복을 키워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봐야 하는 게 그에겐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뒤 1998년부터 3년 동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심정으로 과외만 했다. 돈도 그럭저럭 모였다(현재 그는 4천만원 남짓한 22평 아파트를 갖고 있다). 이때부터 홈페이지를 열어 직접 발견한 수학 관련 공식과 비법들을 공개하기 시작했고, 풍산자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는 과외도 끊고 홈페이지 관리와 수학교재를 쓰는 일을 주로 했어요. 10단계 수학과 수학 Ⅰ·Ⅱ 부분에서는 나름의 노하우가 쌓였고요. 책을 내고 싶었지만 기꺼이 내주겠다고 달려드는 출판사는 없었어요. 정확히 여덟곳의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한곳에서 책을 내자는 제안이 들어와 지난해부터 책이 나오기 시작했죠.” 그러나 <풍산자 수학>은 힘들었던 그의 삶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면서 동시에 혹독한 좌절이기도 했다. 힘들게 책이 나왔지만 큰 호응은 얻지 못한 것이다. 몇몇 독자들은 “책이 성의가 없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나름의 논리를 세운 수학 체계가 일반적인 방법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더 큰 슬럼프에 빠졌다. 원고를 높이 평가하고 출판을 기획한 출판사에 폐를 끼쳤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수학자로서의 삶이 망가지는 듯한 아픔의 시간을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그에게 더 이상 절망의 세월은 없을 듯하다. 금주 선언과 실명 공개를 계기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하면서 자신감도 되찾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잊었던 꿈도 하나씩 찾아가겠다는 다짐도 새롭게 했다. 다만,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처음부터 접었다. “솔직히 부인과 자녀를 둔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요. 삶의 동반자인 배우자와 가정에서 얻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제가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정심으로 저와 결혼하겠다는 여성은 사절입니다. 가정이 아닌 다른 쪽에서 삶의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이는 학업을 계속해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겠죠.”
대안학교 세우고 싶다
그에겐 결혼보다 중요한 다른 일이 하나 더 있다. 어릴 때부터 꿈꿨던 대안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고향, 전북 순창에 말이다. 그동안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이름도 고향 마을의 지명에서 따왔다. 그는 오랫동안 주입식 획일화된 교육의 수혜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대안학교를 세우려는 이유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나이가 들수록 꿈과 멀어지는 현실 속에서 ‘꿈은 꿈일 뿐’이라며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게 되죠. 대안학교를 세우겠다는 꿈도 사실 지금은 많이 꺾였어요. 대학 때만 해도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겠다고 다짐하고 제 꿈을 밝힌 이상 반드시 이뤄야죠. 그때쯤이면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도 찾을 수 있겠죠?”

"수학 문제를 풀 때는 말이나 계산보다 직관과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포항공대를 졸업한 임해호씨는 사람 냄새를 풍기는 수학자가 되려고 한다.
술을 끊고 자신을 공개하다 풍산자로만 알려진 유명 수학강사이자 수학자가 서른여섯 번째 생일인 지난 2월1일 자신의 홈페이지(www.baramsan.com)에 실명을 공개했다. 그가 10여년간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임해호’라는 이름을 공개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세상과 쌓은 담을 허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사실 풍산자라는 필명은 수학강사로, 수학교재 집필가로 ‘업계’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개인생활은 오랫동안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잇따라 <풍산자 수학>이 출간됐을 때만 해도 그는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하지만 숨기면 숨길수록 그의 생활은 세상과 단절됐고, 인간관계도 하나둘씩 떨어져나갔다. 그의 외로움을 달래준 건 날마다 마시던 소주 1병과 담배, 인터넷, 텔레비전이 전부였다. “술은 올해 1월부터 끊었어요. 하지만 술을 마신 뒤 외로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죠. 불안과 초조함은 더욱 커졌고요.” 그는 금주 선언과 실명 공개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을 떼는 계기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포항공대 수학과 대학원을 마친 뒤 울산에 정착한 1996년부터 가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으니, 은둔생활 꼭 8년 만에 내린 결단이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장 빈도가 높은 유전성 질환으로 근육이 점차 위축되는 ‘진행성 근이영양증’ 진단을 받고도 밝은 성격과 적극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혹독한 외로움과 좌절을 딛고 “어릴 때부터 장애인이 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오기가 생겼죠. 친구들과 싸울 때는 무조건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고, 대학 때도 제 힘으로 등록금과 용돈을 마련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는 석달간 전국일주를 하기도 했고요.” 그런 그가 세상과 단절된 계기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울산으로의 이주, 악화되는 병세 때문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어머니는 그 존재만으로도 삶의 원동력이었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는 이후 두번이나 휴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 그는 1996년 박사과정 진학도 포기하고 형이 있는 울산에 정착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련다." 임해호씨의 필명 '풍산자'는 고향 마을 앞산 '바람산'에서 따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