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변신’ 꾀하는 노동현장의 맏언니 심상정씨… 사회의 그늘을 비추는 여의도 햇살을 꿈꾼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심 의원(?)님 파이팅!” 지난 3월5일 민주노동당 중앙당 사무실이 있는 서울 여의도의 한 건물 지하식당. 심상정(45) 민주노동당 중앙위원과 함께 점심을 먹고 막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갑자기 한 손을 추켜올리며 ‘파이팅’을 외친다. 민주노동당 당원인 듯한 여성이었다. ‘(중앙)위원’이라고 한 것인지 ‘(국회)의원’이라고 한 것인지 헷갈린다. 그래선지 심씨도 순간 당황하는 듯한 눈치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총선에 출마
4·15 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여성명부 후보 기호 4번. 당원번호 1107번인 그에게 국회는 ‘갑자기 닥친 일’이다. 당선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국회 앞에서 사진 한컷 미리 찍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자, 그는 “그래도 국회는 아직 너무 튀는데…”라며 머쓱한 듯 손사래를 쳤다. “지난해 내내 많은 사람들이 비례대표 출마를 권유했는데, 금속노조의 사상 첫 산별중앙교섭 과제에 매달려 있어서 깊이 고민하지 못했어요. 그 뒤로도 비례대표 출마 요구가 계속 몰려왔고, 결국 금속노조를 떠나 여기 당으로 오기로 결심했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여성명부 후보자는 심씨를 비롯해 9명이 출사표를 던졌다.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진보정치>가 지난 연말에 당원들을 대상으로 비례대표 후보자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과 함께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심씨가 10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았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홀수(1·3·5·7·9번 등) 순번을 여성한테 배정한다. 따라서 3월15일에 뚜껑을 열어봐야겠지만 비례대표 후보선출 당원 총투표에서 심씨가 순위 1번을 차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진다. 각종 여론조사 정당지지율을 감안할 때 진보정당 사상 첫 국회 원내 진출의 역사적 순간이 심 ‘의원’과 함께할 공산이 큰 것이다.
“4월14일 새벽 여의도 민주노동당 당사는 침울했다. 방송사의 출구조사 결과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탓도 있었지만, 내부 정치만 잘되었더라도 53년 만의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자괴감이 컸다.” 심씨는 2000년 4·13 총선 직후 계간 <창작과비평>에 스스로 이렇게 썼다. 그렇게 진보정당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된 뒤 4년. 이제 심씨가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대표체제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은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물론 국회에 진출하는 사람은 소수일 테고, 따라서 입법 활동에서 당장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수구 보수세력의 담합구조로 돼 있는 국회 안에서 노동자·민중의 ‘스피커’를 확보하게 됐다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 정치가 특권 정치, 돈 정치, 남성독점 정치로 왜곡돼왔고 다수 국민도 ‘백성’에서 ‘황국신민’으로 다시 ’국민’으로, 즉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했어요. 그런 점에서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은 노동자·서민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종자돈’이라고 할 수 있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낯선 이름’
권영길·단병호는 누구나 잘 알지만 심씨는 일반인들한테 다소 낯설다. 그는 누구인가? 구해근(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이란 책에서 두명의 학생 출신 노동자를 10여쪽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한명이 심상정이다. 구해근 교수는 당시 “1980년대 노동운동의 산 증인이랄까, 목적의식을 갖고 현장 속으로 들어가 대중운동을 해온 대표적인 여성 노동운동가라고 들었다”며 심씨한테 인터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여성 한국노동조합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청춘과 중년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정확히 겹쳐 있다.
투쟁과 탄압의 역사를 뚫고 왔지만 그는 주류에 서본 적이 한번도 없다. “운동을 오래하면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것인데 요즘 생각해보니 나는 주류 흐름에 있었던 적이 없어요. 대학 시절(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78학번)에 여학생회를 조직했는데 이것도 정통 학생운동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고, 노동운동가의 길에 들어서도 여성이라 그런지 주류 바깥에 있었죠.” 심씨는 1980년 미싱사 자격증을 따서 위장취업자로 구로공단 공장에 들어갔다. 1985년에는 구로동맹파업을 조직하고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을 주도한 뒤 전노협 쟁의부장을 거치면서 민주노총 건설에 앞장섰다. 최근까지는 금속산업노조연맹과 금속노조에서 사무처장을 맡았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은 유명한데 경력이 초라하다’는 얘기까지 나한테 하더군요. 나는 단위노조 위원장이나 연맹 혹은 민주노총의 임원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어요.” 대신 노조를 조직하고 투쟁을 기획하는 ‘실무자’가 늘 그의 자리였다. 그만큼 빛나지 않은 곳에서 25년간 묵묵히 노동운동을 해온 사람이 심씨다.
심씨는 요즘 검은색 핸드백을 들고 다닌다. 농성장과 거리에서 젊음을 보내고 머리띠 두른 채 노사 교섭 테이블에 앉았던 그의 예전 모습과는 판이하다. “이 핸드백이요? 옛날에 장만한 건데 거의 안 쓰다가 민주노동당에 들어오면서 갖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만날 배낭만 들고 다니다가 핸드백으로 바꾸니 아직도 좀 어색해요.” 여고생처럼 짧고 단정하게 자른 단발머리와 핸드백을 보면 영락없이 소시민 아줌마 같다.
하지만 그의 이력은 강철같이 단련되고 치열하게 살아온 한 선진적 여성 노동운동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전노협 시절 내가 쟁의국장을 맡았는데 그 자리는 ‘인민무력부장’(심씨는 인민이란 말이 괜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며 사뭇 경계했다)이라고 불렸죠. 당시 현대중공업 교육을 갔을 때 ‘전노협 쟁의국장입니다’ 하고 누군가 나를 소개했는데,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내가 일어서서 단상으로 걸어가는데도 모두들 뒤편 문쪽에서 누가 들어오는지 보고 있는 거예요. ‘아가씨’가 쟁의국장일 줄 아무도 몰랐던 거죠. 비합법 싸움을 주도하는 자리라서 우락부락하고 전투적이고 거친 남성 동지일 거라고 다들 생각한 겁니다.” 심씨는 자신이 주도한 1985년 구로연대투쟁을 ‘우리들의 첫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구로동맹파업은 그의 말마따나 ‘노동운동의 암흑기를 뚫고 일어선 역사적인 정치적 동맹파업’이었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모든 언론 지면에 노동쟁의 보도가 1면을 차지한 사건’이었다.
“당시 구로동맹파업 배후 주모자로 지명수배돼 500만원 현상금이 걸린 내 얼굴이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나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컸는데 운동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많이 실망하셨어요. 친정에서 ‘애도 커가는데 이제 정신 차리고 그만두라’고 늘 그랬죠. 아마 아들이 같은 일을 했으면 부모님의 반대가 달랐을 겁니다.” 그는 딸이라서 겪은 설움이 “섭섭하다”고 털어놨다. “이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니까 부모님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배였다.
쟁의국장 ‘아가씨’… 현상금 500만원
이른바 ‘성공한 여성’ 가운데 상당수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이 ‘여성’으로 부각되는 것을 꺼리는 것과 달리, 심씨는 성적 불평등을 겪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줄곧 얘기했다. “그동안 한국노동운동은 여성배제적 운동이었어요. 여성 노동자가 중심의제로 다뤄져야 함에도 그러질 못했던 겁니다. 민주노총에서 임원과 대의원 여성할당제를 하고 있지만 이것도 아직 간부 활동가뿐이죠. 이제 일하는 여성 대중을 광범하게 조직하는 일에 나설 겁니다.” 그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로 꼽은 건 뜻밖에 구로동맹파업 등 투사의 전력이 아니었다. “가장 잘한 일은 ‘결혼’입니다. 우리 여성 활동가들 가운데 결혼하면 끝이라고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결혼한 뒤 삶으로서의 운동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서 또 일하는 여성으로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활동가라고 해서 면제되는 것도 아닌데, 온몸으로 부딪쳐오면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가정 내 부부 민주화도 실천했고….”
그는 국가보안법 등 11가지 죄목이 붙은 최장기 ‘도바리’ 신세로 10년을 살았다. “왜 감옥살이 안 했냐고 나한테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수배생활 중에 (경찰이) 여자들을 잘 구별 못하더라고요. 화장만 조금 하고 다르게 꾸미면 얼굴을 못 알아봐요.” 결국 붙잡혀서 1993년 여름에 재판을 받는데 판사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죄목이 집단폭력, 집단방화 등인데다 이름도 좀 남자 같지, 그런데 정작 아이를 가져 배가 남산만한 젊은 여자가 피고인으로 나오니까 판사가 황당해한 거죠.”
“아, 지회장님! 지지해주면 열심히 보답하겠습니다. 팍팍 좀 밀어주세요. 하하….” 인터뷰 도중 심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금속노조 산하 단위노조 지회장한테 걸려온 전화였다. 비례대표 당원 총투표에서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선거운동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꽤 낯설어 보였다.
“너 아직도 운동판에 있냐”는 질문들
노동운동에 뛰어든 뒤 나이 마흔을 넘긴 활동가들을 만나보면 가끔씩 이런 얘기를 털어놓곤 한다. 예전에는 고교나 대학 동창들이 너 고생한다며 한푼두푼 모아 격려금도 줬는데, 요즘은 “너 아직도 운동판에 있냐”고 한마디씩 한다는 것이다. 과연 심씨를 25년간 여기까지 이끌어온 힘은 무엇일까? 개인적 열망과 헌신일까, 아니면 어떤 철저한 이념이 그를 지탱해준 것일까. “송년회 가서 대학 동기들을 만나면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냐며 혀를 내둘러요. 변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충고하기도 하고…. 하지만 뜻있고 의미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기쁨이 충만해서 내가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동안 잘 버텨왔다고 생각하는데 죽는 날까지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심씨의 두 손은 작지만 두텁다. 남성들이 커다란 주먹을 쥐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그의 손은 오랜 노동운동으로 단련된 두께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를 지켜준 건 이념이라기보다는 현장 경험이었다. “서노련이 이념 논쟁에 휩싸이면서 사노맹 등 여러 정파로 뿔뿔이 갈라져 와해됐는데, 나는 당시 어떤 정파에도 가담하는 걸 거부했어요. 대중운동에 뿌리박은 정치조직이 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죠.” 그래서 서노련 내부 논쟁 과정에서 그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현장 경험주의자’라고 비판받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그는 왼쪽으로 치우친 사람도 아니고 다만 왼쪽과 중간 지점 사이 그 어디에 서 있는, 어떤 이념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념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늘 푸르른 생명의 나무라고 했던가. “언젠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코사투(남아프리카노조협의회)를 방문했는데, 그쪽 간부들이 ‘우리는 사회주의자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레닌식이냐 마오식이냐고 물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 에이즈가 없고 양성평등이 실현되고 흑인도 무상교육을 받는 이런 사회가 사회주의라는 거예요.” 그는 “(노동해방이론을)잘 모르는 사람이 용감한 법”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혁명의 날카로운 칼보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살아 있는 불꽃에 가까웠다.
그런 면모가 ‘첫마음을 잃지 않고’ 청춘과 중년을 흔들림 없이 노동운동에 바친 생명력이었을까. 현장에 몸을 던진 여러 활동가들이 겪게 마련인 ‘대중에 대한 실망’은 애초에 그의 고민이 아니었다. “이념적인 운동이 아니라 실천적 지향으로 긴 호흡으로 운동을 봐야 합니다. 서노련 당시 동지들이 떠나갈 때 김문수씨(현 한나라당 국회의원)가 ‘노동자 정당이 건설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면서 전망 없는 활동 그만하고 이제 정치를 해야 한다면서 민중당으로 함께 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이제 우리가 원내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잖아요.” 선동가는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는 말할 때마다 매듭이 끊어지면서 짧고 명료했다.
노동의 정치, 새로운 희망을 그리다
노동운동의 미래를 얘기해달라고 하자, 그는 대뜸 “나는 그저 일선에서 당장 빡빡 기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 걸 나한테 묻느냐”고 웃었다.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갖는 한계는 분명해요. 기존의 임금 중심의 기업별 분배투쟁으로는 답이 안 나와요. 대공장 정규직 노조가 현장 실리주의로 빠져들고 노동운동이 굴절되고 있어요. 이건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선 문제가 아닙니다. 노동운동도 복지·장애인·교육·환경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포괄하면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로 가야 합니다.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고 제도적으로 풀 수 있는 수단을 노동자들이 만들지 못했는데, 이제 정치 세력화를 통해 돌파해야 합니다. 노조조직률도 10%밖에 안 되고 국회에 의석 하나 아직 없어요. 노동자·서민의 이해를 방어하려면 서둘러 정치 역량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그에게 “노동운동 그만두고 이제 정치 하신다면서요?”라고 말한다. 노동조합운동이라는 대중조직에서 민주노동당 정치조직으로 옮겨온 그는 인생 행로에서 지금 굵은 획을 긋는 전환점에 서 있다. 반짝 빛나는, 야무진 조약돌 같은 중년의 여성 활동가 앞에 이제 ‘노동의 정치’가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25년 노동의 한길, 보수정치를 끝장내겠습니다." 요즘 심상정씨가 건네는 인사말이다.
4·15 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여성명부 후보 기호 4번. 당원번호 1107번인 그에게 국회는 ‘갑자기 닥친 일’이다. 당선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국회 앞에서 사진 한컷 미리 찍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자, 그는 “그래도 국회는 아직 너무 튀는데…”라며 머쓱한 듯 손사래를 쳤다. “지난해 내내 많은 사람들이 비례대표 출마를 권유했는데, 금속노조의 사상 첫 산별중앙교섭 과제에 매달려 있어서 깊이 고민하지 못했어요. 그 뒤로도 비례대표 출마 요구가 계속 몰려왔고, 결국 금속노조를 떠나 여기 당으로 오기로 결심했죠.”


2003년에 열린 금속노조 산별 첫 중앙교섭에서 심상정씨(당시 금속노조 사무처장 · 맨 오른쪽)가 교섭 테이블에 앉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