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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반장과 국회의원/ 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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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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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애/ 평화여성회 국방팀장
새 학년, 새 학기의 시작.

꽃이 피어야 할 3월. 느닷없는 폭설로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 새하얀 눈이 두툼하게 덮인 날,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엄마, 나 반장 됐어.”

“와, 그러니? 축하한다. 어떻게 학기 시작하자마자 반장 됐어? 몇표나 나왔니? 애들이 많이 찍어줬니? 남자애는 반장 안 됐고? 아직 못 찾아뵈었는데 선생님도 너 괜찮다고 하셨니?” 계속되는 질문이 귀찮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눈치다.

“그냥 됐어.”

“엄마, 나 그냥 반장 됐어"


그냥 되는 반장도 있나? 초등학교 때 난 한번도 반장을 해본 적이 없다. 으레 반장이라면 레이스 양말에 화려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등교하던 잘사는 집 아이들이었고, 걔네들 엄마는 복도에서 담임선생님과 유난스레 길게 인사를 나누던 기억이 또렷하다.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반장은 과거시대 부잣집을 배경으로 ‘완장’으로 상징되는 무소불위의 권력 그 자체였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처럼 반장은 교실의 왕초인 선생님과 거의 동격시되는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였는데, 선생님 심부름을 하루에도 열두번씩 하고, 교무실에서 시험지 채점도 하며, 그토록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풍금도 자기 맘에 드는 아이들만 골라 칠 수 있게 하던 완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과후 청소나 매맞기의 벌이 주어졌던 ‘떠드는 아이’를 칠판에 써내려가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 무시무시한 저승사자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1960년대 말 70년대 초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군부 쿠데타 이후 이어지던 군대식 문화, 즉 상명하복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수직적인 정치문화가 고스란히 우리 세계에도 옮겨진 때였다. 부정과 부패와 비민주성과 불평등성의 부조리를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알아버린 우리 세대는 이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모든 악행을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애써 외면해왔다. 어쩌다 차게 되는 ‘완장’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유혹에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그저 몸을 맡기면서.

그런데 우리 아이들의 의식은 우리 때와 같지 않다. 딸 말대로 반장이 별거냐. 선생님은 뒷짐지고 앉아 계시고, 원하면 나가서 자기 비전을 정확히 호소하여 뽑히면 좋고, 안 뽑혀도 그만. 반장이 안 됐다고 해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할 일도, 세상 다 무너진 듯이 한숨 쉴 일도 아니다. 한달에 한번 반장하는 거 기회는 여러 번 있다. 목 매고 달려들 일도 아니다. 여학생이 되든, 남학생이 되든 상관없다. 옛날 우리 때처럼 남자는 반장, 여자는 부반장 하던 식도 없어졌고, 친구들 위에 ‘영웅’처럼 군림할 수도 없다. 아이들은 서로 평등하다. 다음달, 그 다음달에는 나도 반장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런 딸에게 반장 한번 됐다고 호들갑을 떠는 나는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딸에게 물었다, “너 국회의원 한번 될래?”

“그게 뭐 별건가. 반장되는 거랑 비슷하지 않아?”

평등한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다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현실이 어쩌고 세상이 어쩌고, 실력도 비전도 꿈도 없이 야바위꾼처럼 음모와 배신과 술수를 부려 상대방을 짓밟고 올라가서 기업으로부터 돈이나 뜯어내고 정치권과 결탁하여 자기 세나 불리는, 지역연고나 들먹이는 조폭 같은 국회의원들도 있다는 사실을.

국회의원 한번 안 되면 가세가 기울고, 두번 안 되면 이산가족이 되고, 세번 안 되면 집안이 망해버리던 과거 우리네 정치 풍토에서 친구 아버지가 겪은 비극이 새삼 머릿속을 스친다. 세 김씨가 이 땅의 정치사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시절, 친구 아버지는 평생을 한 김씨를 따라다녔지만 끝내 공천 한번 못 받고 ‘팽’을 당하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친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우리 아이들의 의식이 그대로 커나간다면 비계급적이고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정치구조는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리라. 사회가 항상 계급적인 권력구조를 반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소수 힘있는 자의 논리일 뿐 평등한 생각을 가진 대다수의 생각은 아니다. 미래의 어느 날, 딸아이가 집에 들어서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또다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엄마, 나 국회의원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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