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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 동네는 ‘두루’로 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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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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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지역화폐운동 ‘한밭레츠’의 품앗이 현장… 지역 중심의 상거래에서 소비 · 환경 · 이웃의 참뜻 느껴

21세기는 희망의 세기인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엔 현실은 무척 암담하다. ‘세계화’라는 말로 치장되는 다국적 기업과 투기자본의 노골적 횡포는 노동의 착취와 생존권의 위협을 부른다. 지구환경·다른계층·제3세계·미래세대를 향한 일상적 ‘범죄’로 전 지구의 지속 가능성과 공동의 미래는 칠흑같이 어둡다. 소비지상주의와 경쟁주의, 기술의존적·외부의존적 삶은 생활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대안이 대한민국에 있는가. <한겨레21>은 지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대안경제운동, 대안교육운동, 대안생활양식운동, 대안정치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대안운동에 주목하려고 한다. <한겨레21>은 이들 대안운동을 통한 진정한 지역화가 인류공동의 시대적 과오인 ‘세계화’를 극복할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이들의 모토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가져오길 바란다. -편집자

대전= 글 · 사진 김타균/ 녹색연합 국장 greenpower@greenkorea.org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시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가 아닌 공동체나 지역에서 발행한 개성 있는 화폐를 병원이나 학교, 그리고 시장에서 써보자는 생각은 좀 뜬금없어 보인다. 모두가 ‘돈, 돈, 돈’에 매달려 있는 시대에 정말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말 같기만 하리라. 그러나 시나브로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작지만 사람냄새 나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밭레츠의 정기총회 모습.

4년 전 지역화폐 등장… 품 파는 사람들

지난 2월28일 오후 대전시 법동에 자리잡은 ‘한밭레츠’(‘레츠’는 지역통화시스템(LETS·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을 일컬음)의 사무실 입구는 분주했다.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기도 했지만 깜짝 장터가 열렸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내놓은 옷가지며, 신발, 유기농 채소들이 한가득 펼쳐졌다. 옥천에서 포도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돈수씨는 유기농 포도주를 옮기느라 분주했다. 이 포도주 한병은 현금 5천원과 지역화폐 3천두루면 살 수 있다. 편집디자인 일을 하고 있는 최장희씨는 한 봉지에 1천두루와 2천원 하는 유기농 두릅과 500두루와 1천원 하는 상추를 각각 4봉지씩 샀다. 유성구에서 치과를 열고 있는 김기홍씨는 아기옷 세벌을 1만1천두루를 주고 샀다. 이영미씨는 사서 몇번 신어보지 않은 등산화며 남녀 구두를 가져왔다. 몽땅 1만두루에 내놓았다. 즉석에서 흥정이 이뤄졌다.

'원'화와 같은 가치로 쓰이는 지역화폐 '두루'의 모습. 만두루에서 오백두루까지 네 종류가 있다.
지역화폐 ‘두루’가 생겨난 것은 지난 2000년 2월이었다. ‘널리’ 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이 담긴 순우리말인 ‘두루’는 회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쓰는 원화와 등가원칙을 적용해 1천두루는 1천원에 해당하는 값으로 정했다. 한밭레츠 회원이면 누구나 두루로 거래할 수 있다. 모든 가맹점의 거래는 30% 이상 두루를 쓰도록 돼 있다. 6개월마다 제작해 전 회원에게 배포하는 ‘품앗이 도우미’ 안내서가 사무실 입구에 놓여 있다. 회원들이 제공하는 품앗이와 가맹점의 연락처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연회비 2만원 내며 병원·약국도 이용

품앗이 품목은 집수리·농사일·외국어·컴퓨터 교육·자동차 정비 같은 전문기술 품앗이, 편지쓰기·친구되기·아이돌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기술, 능력을 두루 아우르고 있다. 다 읽은 책이나 훌쩍 커버려 입지 못하는 아이옷, 작은 신발처럼 내게는 이제 필요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 나눔시장에선 중요한 상품이다. 가맹점에는 한의원 2곳과 의원 4곳, 치과, 동물병원, 약국도 있다. 채식식당과 건강학교, 카페, 포구사, 목공예점, 컴퓨터수리점, 자전거포, 유아용품점, 학원, 인쇄소들도 포함됐다. 의원과 한의원에서는 의료보험 치료를 모두 두루로 계산하고, 보험이 안 되는 일반치료는 50%만 두루로 받고 있다. 이들 가맹점이 두루 거래를 활발하게 만드는 매개체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회원이 되려면 1년에 2만원이나 매달 2천원씩 내야 한다. 회원은 원하는 것과 줄 수 있는 물품과 서비스 목록을 등록소에 알려주거나 홈페이지에 직접 등록한다. 등록소는 회원업무와 계정관리, 거래기록을 관리하는 사무실이면서 동시에 거래공간이다. 가맹업소의 경우 홈페이지(http://tjlets.or.kr)의 ‘회원모둠정보’를 통해 알 수 있어 따로 거래의사 표시를 하지 않더라도 거래가 이뤄진다. 거래를 원하는 회원들은 직접 연락해 가격과 두루 사용 비율을 결정한 뒤 거래한다. 거래가 끝나면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한 쪽에서 거래내역을 홈페이지 또는 전화를 통해 등록소에 알려준다. 이것은 나눔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고, 널리 알리는 뜻이기도 한다. 일반화폐로 거래되는 품목들은 두루와 현금을 섞어서 거래하지만 회원들끼리 재활용품을 사고팔 때는 두루로만 거래하기도 한다.

거래는 얼마나 활발할까. 지난해 말부터 두루지기를 맡고 있는 박현숙씨가 총회자료집을 보여준다. 지난 한햇동안 2674건의 거래가 이뤄졌고, 거래금액은 3751만6285두루였다. 일반화폐로 거래된 현금은 3695만5940원이었다. 두루 비율이 50.4%로 현금보다 두루가 약간 더 많이 쓰인 셈이다. 거래 특성별로 살펴보면 병·의원이나 한의원을 통한 의료 분야가 절반 가까운 47%를 차지하였으며, 농산물(14%), 업소 거래(13%), 재활용(12%), 서비스(2%) 등이었다. 거래량으로만 따진다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상징되는 주류 경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은 미미하지만, 변화의 싹은 한밭레츠 회원들을 통해 조금씩 감지되고 있었다.

한밭레츠를 움직이는 사람들. 왼쪽에서부터 최대한(운영위원), 권술룡(공동대표), 김병호(유기농 회원), 오순열(공동대표 겸 운영위원장), 김진호(회원)씨.
“요즘과 같은 소비사회에서 소비라는 게 필요한 걸 필요한 만큼 생산해 쓰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필요한 것처럼 세뇌시키잖아요? 이런 상품의 현란한 유혹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쉽지는 않죠. 저는 한달 생활비 중에서 한밭레츠에 쓰는 것이 10~15%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장을 볼 때도 꼭 필요한 것인가를 한번 더 생각하니까 가정 경제에도 보탬이 되고 있어요.”

두루지기 박씨의 말이다. 특별히 살 것도 없으면서 1주일에 두세번은 대형 쇼핑센터에 들러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곤 했지만, 지역화폐에 가입한 뒤에는 카드 사용이 3분의 1에서 절반 정도 줄었다고 한다. “소비와 소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또 다른 학습의 장이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깨닫고 환경운동 이해는 필수

품앗이 학교인 ‘다도교실’에서 만난 권성희씨. 그는 “품앗이 학교나 품앗이 만찬 같은 행사에 참여하면서 회원들끼리 서로 거래도 하고 참신한 생각도 나누면서 잊고 있던 가치인 ‘신뢰’를 다시 깨닫고 있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대전 유성구에서 ‘문학카페’를 운영하는 박광민씨 역시 문화공연과 세미나 장소 대여, 차와 음식 같은 것을 ‘두루’로 나누고 있다. 서울에서 노동야학을 하다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온 박씨는 창립회원이 되면서 생활도 바뀌었다. 그는 이 운동이 활성화하려면 ‘생활문화운동’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카페 지하에서는 독립영화가 꾸준히 상영되고, 인디밴드들의 공연도 열린다.

지역 통화인 ‘레츠’를 처음 들은 많은 사람들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막막하다고 말한다. 한밭레츠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준 박용남 대전시 교통정책자문관은 “지역통화운동을 이해하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공동체를 살리는 운동과 환경운동을 잘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례를 들려줬다. 그는 파스퇴르유업에서 생산한 매실요구르트를 별 생각 없이 사 마시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표기돼 있는 이 매실요구르트 병에는 ‘원유 79.89%(국산), 매실시럽 6.8%(매실 50%, 대만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완제품 매실요구르트를 하나 생산하기 위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목장에서 횡성까지 원유를 실어 나르고, 매실은 우리나라에서 절반, 또 나머지 절반은 대만에서 사들이고, 요구르트 병의 원료는 또 다른 지역의 공장이나 외국에서 수입해서 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다 요구르트의 생산지인 횡성에서 다시 소비지인 대전까지 수송 에너지를 들여 운반하고, 이것을 마시고 난 뒤 빈병을 재활용 업체에 넘겨줘야 요구르트의 긴 생애가 끝난다. 이 매실요구르트의 생산·유통·소비·폐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지구자원이 낭비되는 걸까.

품앗이 만찬은 회원 농장에서 자신이 먹을 음식에다 1~2인분을 더 준비해 함께 나눠먹는 행사다.
독일의 ‘부퍼탈연구소’에서 슈투트가르트시의 딸기 요구르트를 대상으로 한 사례 연구를 보면 폐기과정을 빼고 생산에서 소비까지 걸린 이동거리만 대략 8천km였다. 대량소비 사회는 본질적으로 지속불가능한 생산·유통·소비·폐기 시스템을 갖고 있는 셈이다. 결국 레츠라는 지역 중심의 거래 관계망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분리된 관계를 극복하고 모두가 하나의 순환고리 속으로 통합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대량소비 사회의 대안으로 자리잡을 건가

지역화폐를 실천하려면 몇 가지 현실적 난관이 있다. 가장 큰 고민은 운영에 필요한 재정 문제다. 등록소 운영과 관련해 박현숙씨는 “상근인력의 인건비와 소식지 발행, 홈페이지 유지관리 같은 등록소 운영 비용을 수수료 수입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매 거래마다 발생하는 거래금액의 5%를 수수료로 공제해 쓴다”고 밝혔다. 외환위기 이후 지역화폐 단체들이 30여곳에서 생겨났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채 10여곳이 안 된다. 지역화폐의 근본 이념인 ‘자립’을 이루지 못한 까닭이다.

자립을 위해서는 실사구시 이념을 계속 추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이곳 한밭레츠에서는 지역을 좀더 세분화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 한밭레츠는 올해부터 법동 지역만을 분리해 법동레츠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영구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을 품앗이 문화가 꽃피는 곳으로 가꾸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는 것이다. 반찬가게 형태인 ‘두루부엌’, 문화에서 소외된 지역 주민을 위해 ‘따뜻한 이동영화관’ 사업도 계획 중이다. 박정현 대전충남녹색연합 사무처장은 “한밭레츠가 대안운동으로 뿌리를 튼실하게 내리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생명운동 모임들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밭레츠 사람들은 욕구에서 필요를 구별하는 것, 소비의 양에서 삶의 질을 구별하는 것, 지식에서 지혜를 구별하는 것, 대량생산에서 사람에 의한 생산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다. 이들의 실험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홀씨처럼 날아드는 날, 비로소 우리는 네모난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이 아닌 둥근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신뢰를 나누는 ‘지역통화’

[지역화폐운동이란?]

지역통화 또는 지역화폐 운동은 사실 새로운 사회운동도 아니고, 서양에서 들어온 낯선 운동도 아니다. 두레, 품앗이와 같은 상부상조의 전통과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를 현대에 맞게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통화운동은 기존의 화폐경제 체제가 경제를 조직화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살아가는 데 돈이 꼭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중앙집권화된 통화제도에서 독립한 지역화폐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역통화의 가치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화폐와 달리 회원들간의 거래가 이뤄지는 순간마다 만들어진다. 부채에 대해 이자를 지불할 필요가 없으며, 정해진 상환기간도 없다. 부채는 상품과 서비스 판매를 통해 나중에 상환하겠다는 약속, 즉 신뢰를 뜻할 뿐이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이는 1983년 캐나다 코목스밸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던 마이클 린턴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3천여개의 레츠가 운영 중이다. 캐나다·미국·영국·아일랜드·호주·프랑스·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에서 특히 활발하다. 한국에서는 1996년 <녹색평론>에서 아직 낯선 개념이던 지역통화를 처음 소개했는데, 외환위기 이후 지역통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98년 3월 처음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미래화폐’(fm)란 이름으로 지역화폐 운영을 시작한 이래 경기 안양시 고잔1동의 ‘고잔품앗이’,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의 ‘상봉레츠’, ‘한밭레츠’, 녹색대학의 ‘녹색화폐사랑’, 광주의 ‘나누리’, 서울시 송파구의 ‘송파품앗이’, 녹색연합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작아장터’ 같은 곳에서 지역화폐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동사무소가 주민자치센터로 기능을 전환하면서 지역통화를 시도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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