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인터뷰, 그 뒤…

499
등록 : 2004-03-02 00:00 수정 :

크게 작게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1989년 어느 봄날, 국회 본회의를 마치고 검정색 고급 승용차 뒤 좌석에 기대어 국회 정문을 지나던 중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해산당한 상계동 철거민들을 차창 밖으로 목격하게 됐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철거민들이 혹시라도 내 얼굴을 보게 될까봐 두려워 고개를 숙였고, 어깨를 짓누르는 엄청난 슬픔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그 사람들 앞을 다 지나갈 때까지 나는 나약한 내 모습에서 한없는 부끄러움과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을 확인해야만 했다. 과연 이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뻔질나게 드나드는데, 이 사람들은 문 앞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이놈의 국회에 과연 내가 앉아 있어야만 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1992년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1994년에 발간한 자전적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의 ‘어느 잔인한 봄날’ 편에 고백해놓은 얘기다.

2월28일 이루어진 노 대통령과 <한겨레21>의 단독 인터뷰에서, 지금도 노 대통령이 청와대 정문 앞을 지나거나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면 고개를 숙이고 한없는 부끄러움과 절망감을 느끼는지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언론사와의 단독 인터뷰치고는 파격에 가까운 1시간40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으나, 준비한 질문을 상당량 줄여야 했을 정도로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직무유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여러 날 동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한 택시기사에게 물어봤다. “만약 노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면 가장 물어보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말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했으면 곧바로 국민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면 될 것을, 사과는 하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둘러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고 싶군요.” 비슷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 머릿속에 담아두었으나 역시 시간에 쫓겨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는 한 공기업 간부는 ‘건의’ 성격의 질문을 건네주기도 했다. 현재 한국 사회가 골치를 앓고 있는 청소년·노인 문제, 출산기피, 입시과열, 집값폭등, 이혼증가 등의 문제는 70년대부터 시작된 핵가족화가 심화되면서 빚어지는 부작용이라고 그는 분석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관저에서 아들 부부, 손자와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쳐 이런 사회문제들이 점차 개선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대통령의 의향을 물어봐달라는 주문이었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10분이나 초과한 정도였서 다음으로 미룬 채, 관저가 아들 부부와 함께 살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음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번 인터뷰가 외교안보와 대북송금 특검, 정치 분야 등 3가지 주제에 집중하는 바람에 독자들께서 궁금해할 경제·교육·복지·노동·여성·소수자 문제 등을 다양하게 다루지 못한 점도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총선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노 대통령은 총선 전 열린우리당 입당과 지지 표명을 계속할 뜻을 분명히 했고, 대북송금 관련자 사면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노 대통령은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을 때 자신의 모습을 ‘여의도 부시맨’이라고 표현했다. 원칙을 앞세우며 ‘청와대 부시맨’ 행보를 계속하고 있는 그가 또다시 잔인한 봄날을 맞을지, 아니면 화사한 봄날이 펼쳐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