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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진짜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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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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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탤런트 이승연씨의 ‘일본 군대위안부 누드집 파문’이 제작 중단과 공개 사과로 나흘 만에 일단 막을 내렸으나 음미해볼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성을 상품화하려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문화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나라 망신 수준의 이번 파문이 서둘러 가라앉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류우종 기자
이번 파문을 접하면서 학창시절 중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한 친구가 ‘빨간책’(겉표지가 주로 빨간색이기도 하고, 책을 보고 나면 얼굴이 빨개진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을 학교에 가져온 것이다. 외국인 남녀의 누드에서 성교하는 장면까지 대략 20여장의 사진이 실린 수첩 크기의 사진첩이었다. 대부분의 반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그 친구 책상 주변에 둘러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책을 보며 키득댔다. 성에 눈뜨기 시작하던 사춘기인데다 당시로서는 원시동굴 벽화만큼이나 희귀한 ‘그림’들이어서, 그 책은 한동안 반 친구들 사이에서 많은 화제를 뿌렸다.

지금은 이메일을 열기만 하면 ‘빨간책’ 수십권을 만들 정도의 스팸메일이 홍수를 이루고, 동네 비디오가게에도 야릇한 제목의 테이프가 널려 있으니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요즘도 우리 청소년들이 여전히 성 상품의 주고객인지 자못 궁금하다. 늘 호기심 많은 세대지만 왠지 예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게임, 채팅, 영화, 스포츠, 노래방 등 다양한 여가문화가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성 상품들을 외면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일본 군대위안부 누드집 같은 몰염치한 상술까지 동원된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아니면 혹시 철없는 어른들을 겨냥했을 수도 있겠다. 누드가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은 접어두더라도, 우리 할머니들의 한맺힌 역사의 현장을 누드 촬영장소로 활용한 몇몇 어른들 때문에 모든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됐다. 제국주의 일본의 노예가 되었던 ‘아픔’의 성을, ‘대박’상품으로 만들어 내놓으려 했으니 역사 앞에는 또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할지….

이번 파문은 옷을 벗어서는 안 될 때 벗는 바람에 빚어졌다. 그러나 진실을 은폐하는 거짓과 기만의 옷을 벗어야 할 때, 정작 벗지 않아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과 이라크 추가파병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왜 협정 체결이 시급하고 파병이 불가피한지에 대해 발가벗고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는 정부나 국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때문에 황폐화가 불보듯한 우리 농촌은 분노할 수밖에 없고, 명분 없는 전쟁터로 청년들을 내몰아야 하는 국민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검찰 수사를 통해 불법 대선자금이 수백억씩 드러나고 있지만, 도대체 얼마를 모았으며 얼마를 썼는지에 대해 발가벗는 정당은 단 한곳도 없다. 많고 적음을 떠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벗고 용서를 구하자고 한 것이 벌써 오래인데 말이다. 그 와중에 대통령 사돈이란 사람까지 등장해 653억원 펀드의 실체에 대해 벗었다 감췄다 하면서 국민들을 우롱하니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거짓과 기만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면 의외로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그들만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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