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 재외 학자가 가족을 모두 이끌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서 “해방 뒤 최대의 간첩”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남한 사회에는 간첩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인간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

김명인/ 문학평론가 · 인하대 강사
간첩은 누구인가? 간첩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나는 어린 시절 내내 그게 궁금했다. 누군지 알 수만 있다면, 내가 간첩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여지없이 신고해서 거액의 포상금을 받아 어려운 집안 살림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눈물겨운 생각으로 간첩 잡는 무용담의 상상 속 주인공이 되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당신을 미치도록 만나고 싶었습니다”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간첩은 주로 신문 1면에 조직 계보도와 함께 실린, 너무 험악해서 비현실적인 사진들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때 그 사진들의 하나같이 험악한 모습들을 보고 어린 마음에 ‘간첩은 이렇게 낯설게들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검거되어 오랜 육체적·정신적 고문의 통과의례를 마치고 구속 기소되기 직전에 찍힌 사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참한 몰골들임을 아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간첩들이 득시글거린다고 했는데 나는 어린 시절을 다 보내기까지 한번도 간첩을 내 눈으로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내가 대학 시절 반유신투쟁에 앞장을 서고 있던 중에도 여전히 간첩은 포상금 몇천만원과 등치되는 일확천금의 꿈속에 종종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낯선 타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바로 그 간첩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시경 대공분실을 거쳐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34일이라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나를 간첩으로 확정지으려는 그들에 맞서 내가 간첩이 아님을 목숨을 걸고 증명해야 했다. 다행히 그 증명은 성공해서 나는 간첩 누명은 벗었지만, 수사가 종결된 이후에도 그들은 최소한 내가 간첩과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혐의를 지우지 않았다. ‘간첩’은 현재진행형이다 교도소에 가서야 나는 공식적으로 간첩으로 판명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엔 ‘간첩’이라는 말에 꼭 부합되는, 이른바 남파간첩·고정간첩들이 꽤 여럿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의외로 단순명료했다. 그들은 확고부동하게 ‘이북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의 대남정책을 수행하는 일종의 국가공무원들이었다. 남한의 중정이나 안기부 요원도 남한의 대북한정책을 수행하는 특수직 국가공무원들 아닌가. 그들이 남한에 대하여 ‘명백하고 현존하는’ 체제위협 요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위협도 사실은 간첩과 관련한 수많은 위기담론들과 대중적 상징조작들보다는 훨씬 덜 위협적이었다. 남한의 역대 군사독재 정권들과 천민자본가들과, 그 두 세력에 기생했던 남한 사회의 모든 악한 것들은 그 ‘간첩에 관한 풍문’에 의지해서, 그 풍문을 한정 없이 부풀림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회의하는 모든 사람들은 간첩이거나 간첩의 동조자나 간첩의 사주를 받은 사람으로 낙인찍혀 이 체제로부터 추방되거나 거세되었다. 그러면서 남한 사회는 들큼하게 멍들어간 것이다. 지금 한 재외 학자가 가족을 모두 이끌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서 “해방 뒤 최대의 간첩”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어처구니없어함과 꼭 같은 정도로 지금도 남한 사회에는 간첩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인간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때 ‘간첩’ 동조자쯤으로 취급받거나 자처하던 사람들이 이 불행한 ‘간첩’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연덕스럽게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인의 추억’이 사실은 현재진행형이듯, ‘간첩의 추억’도 이처럼 끔찍하게 현재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