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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박정희 키드’들/ 이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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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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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서강대 교수 · 중국문학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리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크린에 끝내 빠져들었다. 스크린에서 내 고등학교 교실을 만났기 때문이다. 왕년에 권투를 했다면서 아이들을 샌드백 삼아 ‘어퍼컷’ 실력을 자랑하던 고1 때의 담임선생님, 가방에 체인과 쌍절봉을 가지고 다니면서 교실을 늘 공포로 몰고 가던 우리 반 ‘대빵’, 그런 ‘대빵’과 졸개들에게 뺨을 맞아도 돈을 빼앗겨도 숨을 죽였던 나와 내 친구들이 스크린에 있었다. 분하고, 참혹하고, 굴욕적이었던 교실을 스크린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실미도>에 흘러들어온 유령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내 나이 또래, 그러니까 이제는 마흔이 넘어 486이 되었거나 386 후반에 접어든 나이 때의 사람들을 만나면 평소 그들답지 않게 영화 이야기, <말죽거리 잔혹사>가 화제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똑같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그 시절 대한민국 고등학교가 다 마찬가지였고, 영화에서 현수가 학교를 떠나면서 내뱉는 욕 그대로 그 시절 기억 속의 대한민국 학교는 한결같이 “×같은 대한민국 학교”였다는 게 공통된 결론이다.

우리 세대, 흔히 386이라 부르는 세대는 광주 세대, 민주화 세대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박정희 군사정부 시대 출범 즈음에 태어나 그 정권과 함께 성장한 ‘박정희 키드’ 세대이기도 하다. 영화에서처럼, 그 시절에는 학교 자체가, 사실 대한민국 전체가 그랬지만, 하나의 거대한 군사 훈련소였다. 전국 방방곡곡의 학교들이 실미도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폭력의 정글에서 생존하는 법이었다. 그런 군사 훈련장에서 대한민국 남자로, 대한민국의 표준적인 수컷으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키드’ 세대가 겪은 그런 학교, 그런 선생, 그런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영화 속 과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런 시대를 얼마간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며 추억하고 있다. 물론, <실미도>나 <말죽거리 잔혹사>, 그리고 더 이전의 <박하사탕>이나 <살인의 추억> 등은 그런 지나간 과거 현대사에 대한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다른 세대의 역사적 기억과 구별되는 세대론적 차원의 기억이자, 세대론적 역사 해석이다.


70,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386세대 개인들이 겪었던 분산된 기억들을 끄집어내 영화라는 문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조직하고, 그리하여 개인들의 체험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되고, 대한민국 386세대 공동의 문화적 기억, 세대적 차원의 공동의 기억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공동의 기억을 토대로 세워지는 상상의 공동체는 386세대를 하나로 묶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과거에 대한 공동의 기억으로 더 잘, 더 쉽게 하나가 되기 마련이어서, 이들 영화는 알게 모르게 이들 세대의 문화적·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아울러, 이들 세대 감독들의 작품이 폭넓은 대중적인 호응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이들 세대가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기억을 제조하고 유포하는 주도적인 세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럴 때, 386세대가 나이도 들고, 경력과 경제력 등을 구비하면서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어느덧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상징적 사건, 그 문화적 징후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그만큼 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대교체적 새로운 징후들 속에서 몇몇 386세대 감독들의 현대사 영화에 음습하게 스며 있는 구시대의 낡은 유령의 그림자를 함께 본다. <실미도>에서 강우석 감독은 영화를 통해 국가주의를 비판하려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미도>에는 그런 표면적 서사 밑에서 잠류하는, 그러면서 관객들, 특히 남자 관객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흐름이 들어 있다. 근육과 힘으로 상징되는 진짜 사나이들의 세계에 대한 매혹, 철저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진짜 군인에 대한 이끌림이 그것이다. 그 매혹과 이끌림이 할리우드식 상업주의를 노린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미래로 향한 길을 낼 것인가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군사정권 시대 학교가 아니라 군 훈련장에서 성장한 386세대, ‘박정희 키드’ 세대들의 영혼 깊은 곳에 유령처럼 스며들어 있는 어떤 무의식, 자신들이 그토록 고통받았던 파시스트적 욕망에 자신도 모르게 귀신 잡힌 때문으로 보인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착하고 매너 있는 현수보다 강하고 단호한 우식에게 이끌려가는 은주는, 박정희 시대와 더불어 성장한 ‘박정희 키드’ 세대의 무의식의 초상, 아니 딱히 그들만이 아니라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혼돈스러운 지금 현실에서 강한 카리스마의 박정희를 갈망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무의식의 초상이 아닐까. 그래서 우식에게 은주를 빼앗긴 뒤 현수가 그토록 이소룡이 되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는가.

폭군인 아버지와 싸워 결국은 아버지를 타도하였지만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유령과 어떻게 영화적 싸움을 해나가고, 그런 가운데 과거로 가는 추억을 넘어 어떻게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을 갈지, 한국영화의 새로운 주축으로 부상한 ‘박정희 키드’ 감독들의 이후 발걸음을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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