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허 현진건의 단편소설 <불>의 여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고된 육체노동과 시집살이에 시달리면서 밤에는 또 다른 학대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남편의 성적 요구에 몸서리친다. 결국 그는 그 ‘원수의 방’만 없어지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불을 지른다. 소설은 거기서 끝나고 이후에 전개될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방으로 상징되는 그의 참담한 현실은 당연히 끝나지 않았으리라.
‘기득권 세력’의 공격
카를 마르크스는 어디에선가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그대로 역사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무슨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그 말을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가 존재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개인들의 행동이 모여서 구조를 만들어내는 측면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게 해서 형성돼가는 구조가 개인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면서 그 결과의 상한과 하한까지 규정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구조가 개인을 결정하는가, 개인이 구조를 결정하는가라는 물음은 모든 사회과학에 주어진 영원한 숙제일 터이므로, 이 짧은 글에서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여 하나마나 싶은 말이겠지만, 이러한 두 측면 중 어느 한쪽에만 매몰되어 현실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이다.
구조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 구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개인이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등장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2차대전 이전 독일의 사회·역사적 구조가 히틀러라는 개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히틀러라는 개인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와 함께 파시즘적 구조가 순순히 사라져줄 것이라 믿는 것은 순진한 낙관이거나 때로는 심지어 불순한 음모이기조차 하다.
지지자들조차 미처 기대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적어도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차마 믿고 싶지 않은 결과로 대선게임이 끝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되는 바이기는 하였으되, ‘기득권 세력’의 공격은 짐작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캐릭터나 화법, 정치 스타일 등의 문제가 연이어 빌미가 되었던 탓도 있겠지만, 작금의 정치적 대립은 막강한 물리력과 카리스마를 무기로 삼았던 과거의 군사독재 시절보다도 오히려 더욱 무조건적인 지지와 비판의 양상을 띠고 있는 듯하다. 한편에서는 날씨가 안 좋은 것도 대통령만 물러나면 해결될 문제인 듯 푸닥거리를 해대는 ‘무당’들이 설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기도하며 믿음을 버리지 말자는 ‘부흥회’ 분위기로 흘러간다.
사실 ‘하다못해’ 공천이라도 받거나 줄 잘 서서 승진이라도 해야 하는 고위 공무원도 아닌 일반인들이야 이런 종류의 논쟁은 그 격렬함만큼이나 물질적인 이해관계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쉽게 식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구조는 강고하고 개체는 무상하다
나는 오히려 구조보다는 개인 또는 개체를 강조하는 이러한 논의 구조가 확산되는 것이 더 걱정스럽다. 이른바 안티적 운동이 때로는 빈틈조차 없어 보였던 기득권력의 ‘약한 고리’를 찾아 허물어뜨리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일정 부분 수행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역기능에도 주목할 때가 분명히 왔다고 믿는다.
개인이나 개체만 공격하는 것은 자칫하면 스스로 협소하게 만들어버린 논의 지형 속에 갇혀버림으로써 본의 아니게 구조에 대해 침묵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공격하는 쪽으로 되돌아오거나, 엉뚱한 ‘구조의 논리’로 공격을 피해나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케케묵은 표현이지만, 상황에 따라 변하는 주요 모순에만 매달리다가 진짜 중요한 기본 모순은 간과할 수 있는 것이다. ‘원수의 방’이 없어진다고 해서 순이의 시련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구조는 강고하고 개체는 무상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