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고흐!
등록 : 2000-11-14 00:00 수정 :
정열의 화가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자서전 <빈센트 반 고흐-내 영혼의 자서전>(학고재 펴냄)이 최근 나왔다. 그러나 고흐 자신이 살아 생전 자서전을 쓴 적은 없다. 그렇다면 이번에 나온 책은 도대체 뭘까. 미술평론가이면서 화가인 캐나다 동포 민길호(53)씨가 스스로 고흐의 입장에서 쓴 ‘자서전 아닌 자서전’이다. 20여년 동안 고흐를 연구해온 민씨가 스스로 고흐가 돼 1인칭으로 고흐의 일생을 정리한 것.
미대를 졸업한 뒤 캐나다로 이민가 공예가 겸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민씨가 고흐와 인연을 맺은 것은 78년이었다. 우연히 인테리어 공사를 맡은 집 안방에 걸려 있는 그림이 마음을 잡아당겼다. 진품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민씨는 그림이 고흐의 것이라고 확신했고, 집주인에게 그림을 팔 것을 제안해 두점의 그림을 구입했다. 이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그림에서 고흐의 흔적과 생각을 읽어가다가 민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흐라는 주제에 빠져들었다.
“모든 게 인연 같아요. 꾸밈없고 순수했던 고흐를 통해 제 자신을 발견한다고 할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끌려가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책을 내고 공부를 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지 제게 큰 의미는 없어요. 그저 고흐를 연구하고 그의 그림을 통해 교감하는 게 좋았습니다.”
민씨는 그뒤 고흐가 살았던 유럽까지 직접 가서 고흐가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던 들판도 거닐어도 보고, 고흐의 그림이 걸린 미술관마다 찾아다녔다. 뒤늦게 대학원까지 들어가 고흐를 전공해 박사학위 논문만을 남겨놓고 있는 민씨는 이제 한국인 최고의 고흐 전문가가 됐다. 논리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의 인과관계는 그렇게 100년 전 서양화가와 후대의 한 동양인 연구자를 맺어줬다.
“제가 고흐의 그림을 통해 고흐와 나눈 대화는 환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느끼고 본 것이 저에게는 절대적 현실입니다. 저로서는 고흐와 맺은 인연을 저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보자고 한 게 책이라는 성과로 나온 거죠. 다만 이 책을 계기로 많은 순수한 영혼을 지녔던 고흐라는 인물의 실체를 좀더 정확하게 알기를 바랄 뿐입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