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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서울대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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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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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사회는 기존의 형태를 부수고 새로운 세팅을 하느라고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고통은 우리 사회가 힘겹게 형성시켜 가고 있는 특수한 근대 모델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는 피할 수 없는 명제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근대는 인간 인식의 발달이 필연적으로 거쳐가는 형식적 특성이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발달과 제도적 합리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각성한 주체들의 성립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각성한 주체들은 미리 와서 존재의 형태를 예시한다. 서구의 근대 모델에서 정치적·사회적 근대는 정신적 예행연습을 사후에 추인하는 결정적 귀결점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꾸로 밟아나가고 있다. ‘한국적 근대화’가 강행되는 동안, 우리의 정신적 근대는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이러한 퇴행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꾸준하게 이어져왔으며, 그 결과 정치적 민주화는 기준선을 설정했다. 앞으로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이 기준선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학계의 ‘이명원 논쟁’을 보며

근래에 들어서 한국사회는 박정희식 근대화가 지연시켰던 근대적 주체의 확립을 뒤늦게 달성하려는 힘겨운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근대의 외피를 둘러쓰고 전근대적 습속에 머물러 있는 각 분야의 미시권력들을 해체하려는 노력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노력은 ‘문화적 반란’의 양상을 보인다. 그 문화적 반란이 ‘언어행동’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흥미롭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 진영에서 근대성의 문제가 돌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문학은 정신적 근대 경험의 정점으로서 명민한 모델을 제시해왔다. 따라서 문학을 통해 사유하는 자가 진정한 근대의식에 도달했을 때, 습속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체의 억압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젊은 문학 평론가 이명원이 대가 김윤식이 형식화한 근대의 실체성에 대해 질문한 것은 자생적 근대성을 질문하는 주체의 고뇌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본다. 전시대 같았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상징적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든 기득권자들이 그렇듯이, 문학 분야 역시 기득권에 집착한다. 기득권자들은 비판자의 존재 자체를 유령으로 설정한다.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더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비판자의 인격을 문제삼는다. 비판의 적실성을 비판자의 인격과 비판의 심리적 동기를 자의적으로 추정해서 폄하하려고 하는 비과학적 심리주의를 활용한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 기득권자들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과 맞물리면서 기묘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이명원 논쟁’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으로 무참한 느낌이 든다. 이명원을 매도하는 논리들 중에는 도저히 지성인의 그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논리들도 있다. 심지어 삼류대 출신인 주제에 튀어보려고 감히 서울대 출신의 대가를 건드린다는 천박한 인신공격적 발언도 있다. 이것은 특수한 개인의 반응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는 서울대 출신은 의외로 많다.

나는 진정한 엘리트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 능력이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없을 때, 인간의 발달은 침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엘리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한 사회의 엘리트들이 사회 경쟁력을 높이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만일 한 사회의 엘리트들이 전근대적 집단주의에 함몰되어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 엘리트 집단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대는 드라큘라가 되어가는가

서울대는 신화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신화는 그것이 존재 이상을 명령하지 않는 한, 썩고 부패하며, 그 가치를 잃는다. 신화는 존재의 지평을 도달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만들 때에만 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부단한 자기 갱생 과정을 보여주는 원초적 담론이다. 신화가 ‘있는 것’을 신비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신비화를 통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때, 그것은 안쪽으로 고여 썩기 시작한다.

F.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는 거울을 못 견뎌하는 수백년 묵은 추악한 드라큘라 백작을 보여준다. 젊은 조너선이 바라보는 거울을 목격한 드라큘라는 거울에 자기 이미지가 비치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깨어버린다. 혹시 서울대는 지금 그런 드라큘라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힘세지만, 이미 아름답지 않은 존재.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울을 들여다볼 용기를 잃은 존재.

서울대여, 추악한 불사신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매순간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가 누구인가 끊임없이 질문하는 젊은 영웅이 되고 싶은가. 지금 그대의 거울은 어디에 있는가.

김정란/ 시인·상지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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