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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벤자민 자프나이아] “대영제국훈장 웃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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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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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예술을 죽이는 것은 검열제도나 독재자가 아니라네. 왕족을 만나는 유혹, 상류사회에 접근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가슴을 파먹고 창조성을 갖다 처박아버리는 것이라네.”

영국의 대표적인 흑인 시인 벤자민 자프나이아가 쓴 ‘사고 그리고 팔았다’의 한 토막이다. 그는 영국 왕실이 동료 흑인 예술가들에게 수여한 훈위 수여가 이들의 정신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 통렬히 비판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해마다 영국 여왕이 내리는 신년 서훈의 하나인 ‘대영제국훈장’(OBE·Order of the Britain Empire)을 거부해 파문을 일으켰다. 물론 여배우 헨렌 미렌이나 감독 켄 로취 등의 선례가 있긴 해도 자프나이아처럼 ‘저항’ 차원에서 대놓고 거절하기는 매우 이례적이다.

자프나이아는 자신을 ‘구술시인’이라고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구술시인은 미디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주로 퍼져 있는 전통으로, 인터넷 시대의 서구에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1958년 영국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그는 자메이카에서 성장했다. 그의 작품 영감의 원천은 자메이카인 셈이다. 그는 14살에 졸업장도 없이 학교를 떠났고, 결국은 감옥 신세까지 졌다.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싫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배경은 보잘 것없으나 시, 소설, 연극대본 그리고 음악가사를 썼고 텔레비전 방송을 할 정도로 다재다능하다.

영국 왕실은 그간 작위 수여가 주로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만 돌아간다는 비판을 의식해 최근 연예인 등 대중적 인기인에게도 수여하는 등 이미지 변신을 시도해왔다. 지난해에는 엘튼 존, 그리고 올해는 믹 재거 같은 록스타들이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국민의 서훈제도’를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대중적 스타에게 작위나 영예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기존 패턴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액세서리에 불과한 정도다. 더 근본적 변화를 위해서는 총리가 작위 수여자를 천거하는 기존 시스템을 아예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번 자프나이아의 거부로 훈위를 반납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가 받는 훈위의 이름이 ‘대영제국훈위’인 만큼 자프나이아는 그의 선조들을 노예로 삼았고 학대했던 그 ‘제국’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은 웃기는 일이며, 이른바 ‘제국’에 저항하기 위해 거부한다고 밝혔다. 그의 작품은 동물애호에서부터 반인종주의, 그리고 재소자 인권운동 같은 사회문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다. 그는 많은 흑인들의 의문사와 함께 경찰서 수감 중 사망한 사촌의 죽음을 토니 블레어가 직접 설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나는 영국과 세계, 두곳에서 살고 있다. 이 두 곳에서 정의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런던= 조임숙 전문위원 joimsoo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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