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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최루탄 연기 속에 선명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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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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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봄날]

만약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너무 이른 학창시절에 이미 내 인생의 봄날을 맞이했다. 초등학교 때 그 잘난 실력 덕분에(아직도 그것이 내 실력인지 극성맞은 어머니의 치맛바람인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계속 반장에 뽑혔고, 고등학교는 들어가기 어렵다던 명문 고등학교에 떡 합격하였고, 대학도 1지망은 아니었지만 맨 뒤로 문 닫고 들어가 과대표까지 출마했으니 내 인생에 있어 화려한 봄날은 조명받던 학창시절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속 깊이 오래 간직하고픈 인생의 화려한 봄날은 대학 신입생 시절 눈부시게 따가운 5월 어느 봄날의 추억과 함께 있다. 당시 독재정권에 항거해 거의 매일 가두시위가 있었는데, 그날도 나는 선배의 지시로 끌려나가 ‘가투’(가두투쟁을 우린 항상 그렇게 불렀다) 현장에 있었다. 차츰 시장통에 모여드는 상기된 표정의 학생들을 보면서 장님이라도 그들이 장보러 나온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긴장도 잠시, “독재정권 타도하자”는 한 학우의 우렁찬 목소리와 전단지가 뿌려지고 우리는 도로 한가운데를 점거하며 구호를 외쳐댔다. 하지만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전경들과 페퍼포그가 내뿜는 연기에 몇초를 버텨내기도 어려웠다.

전열은 개미가 흩어지듯 흩어졌다. 안개처럼 밀려오는 독가스 연막에 선배를 찾을 틈 없이 시장골목의 좌판을 넘어 달아나는데 갑자기 뒤춤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잡혔구나 생각하며 자포자기하려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당기는 것이 아니라 내게 끌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생머리에 앳된 얼굴의 여학생이 내 허리춤을 잡고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선배 손에 이끌려 가투에 처음 나온 모양이었다. 순간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끌고 자욱한 최루가스로 뒤범벅이 된 시장통을 지나 한참 만에 적막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구호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숨소리도 느낄 만한 적막감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자 그녀는 수줍음에 손을 빼며 말 없이 반대쪽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나도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마디 말도 못 건네보고 십여분 동안 같이 도망다녔을 뿐이지만, 그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다. 그녀는 ‘동지’가 아니라 생머리에 앳된 여학생으로 기억된다. 졸업 때까지 집회나 가두시위 현장에서 틈만 나면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졸업 뒤 내 인생의 화려한 봄날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 흔한 경품조차도 당첨된 적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노동절 집회에 참가한다. 생머리에 앳된 여학생이 집회장 어느 한 구석에 씩씩하게 아줌마로 있기를 바라며….


최일우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 ‘내 인생의 봄날’은 이번호로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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