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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수의 꿈, 그리고 오래된 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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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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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봄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시간이 지나 생채기에 딱지가 붙고 나면 아름답게 마련이다. 추억은 모두 빛난다고 하지 않던가! 나에게 아름다운 시절은 초라했지만 순수했던 꿈을 간직하고 있던 때이다. 가난했지만 단지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하루를 꿈꿀 수 있었던 나의 청춘. 물론 나의 청춘은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오늘을 살게 하는 청량제로 지금까지 간직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나에게는 노래에 대한 꿈이 있었다. 대중 스타가 되고자 하는 소시민적 욕망이 아니라 노래 자체에 대한 열정이었다. 특히 민중 음악을 하고픈 남다른 포부가 있었다. 세월의 장난인지 삶의 풍랑 속에서 헤매던 나는 군대를 가야 했고, 입대하기 전 어느 주차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홍헌상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와 같이 일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고, 서로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홍헌상씨는 굉장한 음악 수집가였다. 그 당시 희귀 음반부터 시작해서 1천여장이 넘는 음반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직 어리고 무모했던 나에게 그는 이런 노래도 한번 들어보라면서 테이프 두개에 노래들을 녹음해주었다.

나는 몇 개월 뒤 일을 그만두고 군대에 갔고, 홍씨가 녹음해준 테이프는 방안 구석에 처박히게 되었다. 지금 나는 그 당시의 홍씨 나이가 되었고, 몇년 전부터 그 노래들을 듣고 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삶의 모순들을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이해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방안 구석에서 먼지에 뒤덮여 있던 테이프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홍헌상의 Best Pops’라고 쓰여져 있었다. 글씨를 잘 못 쓰니까 직접 쓰라면서 건네주던 노래제목들을 내가 하나하나 옮겨 적어놓았던 것이다.

어느 선배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면서 나는 노래에 대한 꿈을 접었다(사실 축가를 그렇게 썩 잘 부르지 못했다). 홍씨는 그 당시 우체부가 되고자 했었다. 그 꿈을 이루었을까? 그에게서는 시인의 향기가 났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를 생각하면 영화 <일 포스티노>가 생각난다. 나의 첫 번째 꿈을 간직하고 불나비처럼 불 속으로 향하고자 했던 그 당시가 나에게는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눈부시다. 이젠 그가 녹음해준 노래들을 음미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고 삶에 녹아가고 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노래들을 녹음해준 홍씨에게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던 것 같다. 그의 노래 속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여전히 그가 ‘Hold your dream!’ 하고 있길 바래본다.


김재호 |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4동 20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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