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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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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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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봄날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벌써 3년 전의 일이지만 그 뒤로도 5월이면 내 어린 날 철없던 아픔들이 되살아난다. 일년 동안 만나온 남자친구의 군 입대 뒤 유난히 휴대전화로 장난전화가 많이 왔다. 그날도 어김없이 벌써 열통이나 넘게 전화를 받으면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는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겠거니 하고 넘겨버렸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나 역시 그렇게 전화기를 들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전화기 저편의 그 사람은 갑자기 흐느끼고 있었다. 가녀린 목소리의 여자는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한번만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약속장소에서 그 여자를 찾는 것은 나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울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눈은 퉁퉁 부은 채로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묶은 여자가 한눈에도 그 여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군대 가기 전 우연히 남자친구의 지갑 속에서 본 사진 속의 그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군대 가기 전에 잠시 나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겠지 하는 생각에 지나쳐버렸건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다가가자 여자는 또 한참을 울더니 손을 잡는 것이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에 옆으로 가 어깨를 쓸어주며 다독였다. 한참을 울며 말하던 그녀와 나는 바다에 갔고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서도 한참을 울었다. 또 그녀가 갈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간 곳에서 그녀가 볼일을 다 보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녀는 볼일을 다 보고 나왔지만 힘들었는지 아니면 마취가 덜 깨었는지 바로 잠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는 내내 나는 그녀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남자친구에 대한 배신감보다 그녀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앞서 울고만 싶었다.

잠에서 깬 그녀는 내게 면목 없다고 말하며 이제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오는 내내 웃고만 있었다. 병원을 나오면서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저 5월에 햇살이 너무 눈부셔 우노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녀도 나도 그 남자와는 연락을 끊어버렸지만 그녀와 나는 어느덧 가장 친한 언니, 동생이자 친구 사이로 남아 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일에 대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녀와 내게 그해 5월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 아픔과 시련을 가르쳐준 인생의 밑거름이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비가 봄을 알리기 위해 번데기에서 깨어나듯이 그렇게 말이다.


황혜선 | 경북 경산시 중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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