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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해 봄, 가난한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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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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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봄날

“여보. 이제 내가 늙나봐요. 봄이 아까워 죽겠어요.” 내일쯤이나 화려한 봄꽃구경에 나서 볼 참으로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봄이다, 이 좋은 계절에 어쩌고 그럴 때마다 얼마나 식상해했는데. 그때 우리들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은 오로지 가을뿐이었거든. 도대체가 어른들은 그깟 봄이 무에 그리 절절하다고 우리를 앞에 두고 봄봄 하는지…. 근데 지금은 봄이 돌아오는 게 너무 신기해요. 내가 지금 늙는 거 맞지요?” 읊고 있는 내 대사가 가히 1960년대 여배우 수준이건만 남편은 끝내 심드렁하다.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이 남자가 11년 전 어느 봄날에 자기 집 동네 앞산에 올라가 그때 만개했던 들꽃들을 꺾어 나에게 건넸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때의 봄날은 이 사람에게는 어떤 추억이 되어 있는지.

그해 봄은 남편(당시는 남편이 아니라 직장동료였다)이 직장에서 해고된 지 일년 째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시절이 언제인들 다르겠는가마는 그 무렵 노동운동은 지금보다 더 척박했다. 갈 곳이라고는 노조 사무실밖에 없고 박봉의 월급조차 끊긴 지 1년이 넘던 이 남자가 들고 온 그해의 봄꽃. 그 꽃을 받아 든 나는 비참했다. 줄기에서 번성하였으나 꺾인 그 시간부터 시들기 시작했을 시든 들꽃다발이, 이제는 연인에게 꽃을 사줄 여유조차 없어진 그의 현실을 하나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때가 우리들의 봄날이었던가? 이 남자는 그 봄날, 야생의 들꽃을 꺾으러 다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그는 봄날의 눈부신 볕 아래서 자신의 암담한 현실 때문에 아지랑이 같은 노란 현기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꽃을 꺾으면서 아무리 원해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잊으려 애썼을지도. 그때가 그렇게도 즐기지 못했던 우리들의 봄날이었다.

연분홍 연애시절의 시작이었건만 봄꽃이 피어도 우리의 앞날은 기약도 할 수 없는 겨울과 같았다. 미숙한 성년이었던 우리들은 둘의 현실에 가로놓인 겨울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왜 그때는 가난한 청춘도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우리가 어두운 방구석에서 추위를 걱정하며 떨고 있는 그 사이에 먼 산밑의 봄은 벌꿀처럼 녹아 흐른다는 것을 그때엔 왜 알지 못했던 것일까. 봄날은 그렇게도 쉽게 가버리는걸.


오늘, 나는 남편의 다리에 가로누워 바깥 창으로 흐르는 봄날을 아쉬워한다. 그리고 남편의 마디 진 손가락을 보듬는다.

이영희 | 대구시 남구 대명6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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