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봄날
서른다섯 노처녀 Y씨는 국내 굴지의 주간지에서 ‘봄’에 관한 사연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응모만 해도 책 한권에, 당선되면 10만원을 준다는 소식에 혹한 Y씨. 남들은 복권으로 수백억원의 당첨금을 가져가는 판국에 인생 대역전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이름 석자를 만방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터이니 Y씨는 당장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봄날이라…. Y씨는 중3 개학하던 날 돌아가신 엄마, 그리고 그해 봄소풍 때 김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언니와 고민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냐, 이건 너무 칙칙하고 우울하지. Y씨는 시간을 뛰어넘어 봄이 오는 캠퍼스의 잔디밭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명색이 386세대면서 역사, 집회, 최루탄과는 거리가 먼 철없는 시절을 보냈다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자신을 얼마나 생각 없는 사람으로 바라볼 것인가? 차라리 그 시절 사랑 이야기를 한번 써볼까? Y씨는 기숙사 오픈하우스에 초대했던 H군을 떠올렸다.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었던 이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뭐하며 살고 있으려나 궁금해진 Y씨. 동창 찾는 사이트에 로그인한 뒤 그 이름 석자를 찾아보았으나 등록돼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김이 빠져버렸다. 에라, 사랑은 무슨 얼어죽을. 순간 Y씨는 <살인의 추억>에서 서 형사가 버릇처럼 주절대던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라는 대사를 생각해냈다. 그래, 일기장 속엔 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만났다. 답답하다. 살 좀 빼야지. 정신 차리고 살자”로 10년 넘게 일관되고 있는 일기장 속 남루한 문장들이 Y씨의 지난날들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정녕 서른다섯해 먹도록 ‘나의 봄날’은 이렇게 무미건조했단 말인가? 오, 신이시여! 이럼 안 되는데. Y씨는 다시 힘을 내서 기억나는 봄날이라고 애써 우겨볼 만한 후보선수들을 짚어본다. 오래 묵은 친구들을 예식장에서 남의 손에 빼앗겨버린 어느 봄날, 영화 두편을 보고 감동 먹었던 며칠 전 비오는 봄날, 어느 모임의 후배들을 위해 커플매니저로 나서겠다고 푼수짓을 했던 처절한 봄날.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어느새 거금 10만원과 책을 향한 집념은 사라지고 Y씨는 노래 한 소절을 도돌이표를 그려가며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부르다 지칠 무렵 창문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Y씨는 마음이 저릿해옴을 느낀다. 봄날이 간다. 나는 보내지 아니하였지만 기어코 내 생애 또 하루 봄날이 가고야 마는구나. 순간 Y씨는 무릎을 쳤다. 엑스트라처럼 무수한 지난 봄날이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2003년, 햇살 따스한 일요일에 한바탕 쇼를 벌인 뒤에 얻은 깨달음, 이 짜릿한 순간을 쓰면 되겠군! Y씨는 만세를 부르며 서둘러 노트북 전원을 켰다.
이윤영 | 충북 충주시 봉방동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