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봄날
P형!
“이게 보리다.” 당신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가리키는 산비탈엔 이제 겨우 한뼘 정도가 된 싱그런 초록빛이 땅색을 깊이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가에 짙게 내려앉은 그늘이 지난 겨울 당신이 겪었을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저 웃음을 지어주는 일밖엔 달리 할 게 없더군요.
춥고 힘들었을 당신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둘이서 애써 다른 이야기만 했지요. 이렇게 앉아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봄볕 무성했던 그 어린 날들의 교정이 생각납니다. 그때도 당신은 지금처럼이나 어른스러운 눈길이었고, 그래서 덜 자란 친구의 머릿속을 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저 친구는 뭐가 저렇게 괴로울까, 저 친구의 가슴엔 무엇이 응어리진 것일까, 저 친구는 우리들하고 달라” 하면서 괜히 말입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는 언제나 무거웠고 당신의 눈길은 언제나 우리들이 쳐다보는 것보다 훨씬 뒤쪽을 보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P형! 때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당신과 함께 말 없이 앉아서 응시하던 적막했던 그 시간이 지금도 근사한 풍경으로 가슴에 남아 있는 걸 아시는지요
그 가슴 뭉클했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서로의 길이 달라져서 한참을 못 만나고 지나쳤던 어느 해 여름, 한낮의 뜨거움이 넘실대던 길 한가운데서 우연찮게 만난 당신. 타고 가던 자전거를 세우고 악수를 청하던 당신의 손을 붙들면서 잠시 눈물을 비쳤던 듯합니다. 당신은 그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출가’할 뜻을 전했지요. 놀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던 운명의 수순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섰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얻어야 할 것을 구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스무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올 겨울, 전화를 걸어온 당신은 많이도 지쳐 있었습니다. ‘잘 이겨내야지’를 되풀이하면서 힘들게 입을 연 당신의 목소리가 가엾기만 해서 당장이라도 당신께 달려가고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겨울은 아직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맴돌고 있었군요.
P형! 오늘, 당신은 다시 그해 여름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당신은 다시 바랑을 챙겨들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고 어리숙한 친구는 그저 당신의 손을 또 한번 잡아볼 뿐입니다. 길 한가운데에 당신을 세워두고 돌아오는 길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P형, 많이 걱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언제고 당신이 환한 웃음으로 소식 전해줄 때, 그때를 맘 편히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들려줄 ‘당신의 봄날’에 대한 소식을 말입니다. 정진하십시오.
이경민 |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이경민 |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