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 독자에서 기자로 변신하는 순간의 감격… 좋은 사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될 것
이주의 독자/ 수습기자 최종합격자 최혜정
“드디어 나는 물을 만났다!”
10월12일 <한겨레> 수습기자 최종합격자 발표를 보고 나는 이렇게 외쳤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의 맹렬 독자에서 기자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몇년 동안 나는 매주 화요일 서점으로 달려갔다. <한겨레21>과 <씨네21> 두권을 사기 위해서였다. 학부 때부터 동성애나 여성문제 등 소수자의 인권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내게 <한겨레21>은 ‘교재’ 이상의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며, 권력화하는 모든 것을 감시한다는 비판정신이 좋았다. 그러다 세뇌 단계를 거쳐 어느덧 중독 증상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그래. 이왕 중독된 김에 들어가서 빠져 보자.” 기자가 되고픈, 특히 <한겨레> 기자가 되고픈 희망은 98년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세웠다. 그러나 때는 IMF시대. 언론사는 신입 기자 채용을 중단했고, 그 시절의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이 나도 연구자라기보다는 ‘IMF 실업자’의 한 사람으로 대학원을 진학했다. 이번 <한겨레> 시험은 그러한 나에게 결전의 순간이었다. 1차 필기와 2차 논술시험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이제 2∼3배수로 압축된 가운데 ‘합숙평가’라는 최종관문을 넘어야 한다. 10월4일. 3차 전형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무식이 죄는 아니”라는 평소의 신념을 곱씹으며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로 향했다. 평가위원 소개에 이어 일정표가 배부됐다. 식은땀이 흘렀다. 면접 두번에 기사작성 두번, 집단토론…. 드디어 실무면접 차례가 왔다. “인생을 바꾼 책은 무엇입니까?” ‘앗! 아직 인생을 바꿀 만한 책을 찾지 못했는데….’ “인생을 바꿀 만한 책은 아니지만 몇년 전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라는 책을 보며 동성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 연예인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이 논란이 되었던 터라 관련된 질문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첫날의 기사작성 과제는 ‘2000년 가을 대학축제’를 주제로 피처(읽을거리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다. 당시 축제를 하고 있던 성균관대로 몰려갔다. 저녁식사 이후 기사작성을 위해 주어진 2시간은 너무 짧았다. 시간 안배를 잘못해 막판에 초인적인 힘을 쏟아 기사를 마무리하는 순간 한숨이 흘러나왔다. 10월5일의 첫 번째 일정은 토론. 주제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의 사외이사 취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평가위원은 “어떤 입장을 취하든 관계없으며, 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평가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토론을 해야 한다는 황당한 경험. ‘하지만 난 할 수 있어….’ 공정하게 경쟁하되 이 순간 나를 당당하게 주장해야 한다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2차 토론 주제는 ‘서태지 현상’이 제시됐다. 둘쨋날의 과제는 서울 신촌에서 열리는 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 출범식에 가서 스트레이트와 스케치 기사를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취재비 2만원을 지갑에 챙겨넣자 힘이 솟았다. ‘나도 이 순간은 기자야’라고 다짐하며 부딪쳐 나갔다. 집회를 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참가자들에게 하나씩 물어 수첩에 적었다. 그날 밤엔 기대하던 ‘친교의 시간’이 마련됐다. 평소 지면으로만 접했던 기자들과 함께 술자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동료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거나 기묘한 춤으로 화면을 가리는 따위, 갖가지 끼가 속출했다. 3차 술자리(북한산 계곡의 실내 포장마차)에서는 평가위원들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순간만은 응시자와 평가위원이 아닌, 선후배가 머리를 맞댄 느낌이었다. 10월6일. 마지막 순서로 임원면접이었다. 한명씩 들어갔던 첫날의 실무면접과 달리 이번엔 3명이 한번에 들어가는 형식이었고 시간도 훨씬 길었다. 질문 내용은 지원동기부터 경제위기에 대한 생각, 취재하고 싶은 아이템 등 다양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머리 속에는 한마디만 맴돌고 있었다. ‘나도 선배들처럼 한겨레에서 일하고 싶다.’ 비록 운좋게 내 이름을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난 알고 있다. 세상을 향한 부끄러움과 열정은 함께했던 19명 모두 같았음을….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노력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임을 말이다.

“그래. 이왕 중독된 김에 들어가서 빠져 보자.” 기자가 되고픈, 특히 <한겨레> 기자가 되고픈 희망은 98년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세웠다. 그러나 때는 IMF시대. 언론사는 신입 기자 채용을 중단했고, 그 시절의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이 나도 연구자라기보다는 ‘IMF 실업자’의 한 사람으로 대학원을 진학했다. 이번 <한겨레> 시험은 그러한 나에게 결전의 순간이었다. 1차 필기와 2차 논술시험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이제 2∼3배수로 압축된 가운데 ‘합숙평가’라는 최종관문을 넘어야 한다. 10월4일. 3차 전형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무식이 죄는 아니”라는 평소의 신념을 곱씹으며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로 향했다. 평가위원 소개에 이어 일정표가 배부됐다. 식은땀이 흘렀다. 면접 두번에 기사작성 두번, 집단토론…. 드디어 실무면접 차례가 왔다. “인생을 바꾼 책은 무엇입니까?” ‘앗! 아직 인생을 바꿀 만한 책을 찾지 못했는데….’ “인생을 바꿀 만한 책은 아니지만 몇년 전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라는 책을 보며 동성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 연예인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이 논란이 되었던 터라 관련된 질문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첫날의 기사작성 과제는 ‘2000년 가을 대학축제’를 주제로 피처(읽을거리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다. 당시 축제를 하고 있던 성균관대로 몰려갔다. 저녁식사 이후 기사작성을 위해 주어진 2시간은 너무 짧았다. 시간 안배를 잘못해 막판에 초인적인 힘을 쏟아 기사를 마무리하는 순간 한숨이 흘러나왔다. 10월5일의 첫 번째 일정은 토론. 주제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의 사외이사 취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평가위원은 “어떤 입장을 취하든 관계없으며, 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평가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토론을 해야 한다는 황당한 경험. ‘하지만 난 할 수 있어….’ 공정하게 경쟁하되 이 순간 나를 당당하게 주장해야 한다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2차 토론 주제는 ‘서태지 현상’이 제시됐다. 둘쨋날의 과제는 서울 신촌에서 열리는 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 출범식에 가서 스트레이트와 스케치 기사를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취재비 2만원을 지갑에 챙겨넣자 힘이 솟았다. ‘나도 이 순간은 기자야’라고 다짐하며 부딪쳐 나갔다. 집회를 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참가자들에게 하나씩 물어 수첩에 적었다. 그날 밤엔 기대하던 ‘친교의 시간’이 마련됐다. 평소 지면으로만 접했던 기자들과 함께 술자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동료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거나 기묘한 춤으로 화면을 가리는 따위, 갖가지 끼가 속출했다. 3차 술자리(북한산 계곡의 실내 포장마차)에서는 평가위원들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순간만은 응시자와 평가위원이 아닌, 선후배가 머리를 맞댄 느낌이었다. 10월6일. 마지막 순서로 임원면접이었다. 한명씩 들어갔던 첫날의 실무면접과 달리 이번엔 3명이 한번에 들어가는 형식이었고 시간도 훨씬 길었다. 질문 내용은 지원동기부터 경제위기에 대한 생각, 취재하고 싶은 아이템 등 다양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머리 속에는 한마디만 맴돌고 있었다. ‘나도 선배들처럼 한겨레에서 일하고 싶다.’ 비록 운좋게 내 이름을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난 알고 있다. 세상을 향한 부끄러움과 열정은 함께했던 19명 모두 같았음을….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노력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임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