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 전우회 폭력으로 심포지엄 무산
등록 : 2000-10-17 00:00 수정 :
(사진/고엽제 전우회원들의 행사장 입구 점거가 계속되는 가운데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사령관이 보낸 이청목(오른쪽서 두번째)씨가 행사 관계자들과 사태해결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저 맞았다.
지난 10월13일 오후 1시15분, 서울 중구에 위치한 서울시의회 별관 로비. 1시30분부터 열릴 예정이었던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관한 심포지엄’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사단법인 고엽제후유의증 전우회’ 회원 20명이었다. 이들은 사실상 이곳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미 전우회원들의 ‘협박’에 굴복한 서울시의회쪽은 행사장을 걸어잠그고 마당에 ‘장소허가 취소’를 알리는 푯말을 세워둔 상태였다. “가스총을 들고 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행사장 주변을 감돌았다.
이 행사를 주최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대표 이해동·강정구) 차미경 집행위원장과 자문위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이 로비에 들어서자 전우회원들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뭐야?” 행사 주최 실무자라고 신분을 밝히자마자 전우회원 10여명이 달려들어 두 사람의 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해댔다. 이미 행사장 주변에 대기중이던 남대문서 소속 경찰들도 아무 소용없었다.
애초 이날 행사엔 채명신 전 초대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토론자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주최쪽으로부터 사태를 전해들은 채명신 장군은 재향군인회참전단체총연합회 기동봉사단 이청목 단장을 급히 보내 설득을 시도했다. 이청목 단장은 “일단 심포지엄에 참여해 여러분의 의견을 밝히라”고 고엽제전우회원들을 종용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울 때 기저귀 차고 있던 놈들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채명신 전 사령관이 와도 소용없다. 우린 여기를 지킨다.”
행사 예정시간 두 시간이 지났지만 심포지엄 발제·토론자들과 50여명의 방청객들은 행사장 밖에서 삼삼오오 서성거리며 쌀쌀한 날씨 속에 떨어야만 했다. 다른 행사장소를 물색하다 결국 행사를 포기한 주최쪽은 오후 3시30분께 방청객에게 행사의 취지와 무산 과정을 설명하고 돌려보내야만 했다. 방청객이 허탈한 심정으로 서울시의회 정문을 나설 무렵 번쩍거리는 경광등과 함께 요란한 사이렌음을 내는 봉고차가 들어섰다. ‘고엽제 전우회 서울 남부지부’라는 이름이 적힌 차 안에서는 군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중년의 남성들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들도 역시 일그러진 우리 역사의 또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밝히는 일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겪어야 할 일이라면 진실위원회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앞으로도 역사의 길눈이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고한 폭력의 벽과 마주치고 있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지난 10월16일 이번 사태와 관련해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다.
(‘베트남전쟁의 성격’, ‘미군과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원인과 사례’ 등 베트남전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총체적 정보가 실린 심포지엄 자료집 구입을 원하는 독자는 ‘베트남전 진실위’로 전화하시면 됩니다. 02-3675-5810, 발송비 포함 5000원)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