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휴가는 섬뜩했네
등록 : 2002-08-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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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괴담 응모에 독자들의 성원이 뜨거웠습니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여름이더군요. 특히 휴가시즌에 주룩주룩 쏟아진 비 이야기와 한밤중 귀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한정된 지면 때문에 모든 독자의 글을 실어드리지 못하는 점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약속대로 글을 보내준 모든 분들께 조연현 기자의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을 보내드립니다. 고심 끝에 선정한 7개의 휴가괴담과 함께 떠나가는 여름에 작별을 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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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실에서 끝낸 거제도 휴가
2. 나, 애인, 전 남편, 그의 애인
3. 상가에서 만난 소복 여인
4. 오호 통재라, 서해교전이여
5. 커피 쏟을뻔한 시댁과의 동행
6. 엄마는 밤마다 사라졌다
7. 출산예정일은 8월로 잡지 말라
(휴가괴담 1)
병실에서 끝낸 거제도 휴가
월드컵 4강신화를 이룬 역사적인 2002년 휴가지는 거제도다. 2박3일 짧은 여정의 첫날밤은 꽤 스릴 넘치는 시간이었다. 운좋게 흙집을 민박으로 잡아 젊은 시절 물레방앗간에서 아내와 즐기던 로맨스가 생각나서 이리저리 너스레를 떨어봤다. 아내와 에로틱한 장면을 연출하던 찰나에 갑자기 쿠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창호지문을 확 열고 한발을 내디뎠더니 웬 놈들이 나를 밀치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으악!” 아내와 아이들이 내 비명소리에 더 놀라 모두들 뛰쳐나왔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이 녀석들이 우리 가족의 일용할 양식과 버너며 코펠을 모조리 훔쳐간 것이다.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다. 아이스박스에 가지런히 놓아둔 고기며 수박이며 맥주캔에 주방기기까지 이거 완전히 털렸다. 내가 조금만 젊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머리 끝까지 분이 치솟았다. 아이들과 아내를 다독거려 재워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한 모금 물었다. “에이 결정적인 찰나에… 좀 나중에 올 것이지.” 그냥 씁쓸한 웃음이 났다.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뜨거운 아침 열기를 느끼면서 눈을 떴다. 아내와 아이들은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우고 있었다. “부산 사람은 부산에서 놀지 뭐하러 거제도까지 와서 이렇게 사람을 보태놓느냐”는 동네 아낙의 불평을 뒤로 하고 가까운 옥천 해수욕장에서 신나게 물장구를 쳤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아내 주장에 짊어지고 온 것들을 모조리 도난당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며칠 동안만 무소유의 편안함을 느끼며 넉넉한 사람들의 모임에 이리저리 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컵라면을 집어들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 지나가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젊은 청년들 가운데 한명이 확실히 내 눈 안에 들어왔다. 순간 섬광처럼 내 머리를 스치는 어둠 속의 그 얼굴. 그래, 바로 어제 그 추억의 밤을 망쳐버린 놈이다. 분이 머리 끝까지 치솟아 집어들었던 컵라면을 놓아두고 그 녀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를 밀친 녀석은 체격이 마른 편이었지만 키는 커서 제법 주먹깨나 쓸 듯했다. 그래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연약해보이는 한명이 홀로 떨어져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때다 싶었다. “야, 너 어제 우리집 아이스박스 훔쳐갔지?” 아니라며 태연히 무시하고 돌아서는 녀석의 태도에 너무 기가 막혀 온몸의 힘이 주먹으로 쏠렸다. “퍽” 난 가볍게 갔는데 이 녀석은 둔탁하고 섬세한 제스추어로 “퍼어억” 강하게 왔다. 난 그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줄 알았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식구들은 황당한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몸이 쑤시고 무너진 자존심에 마음이 더 아팠다. 휴가 가서 험한 일 당해도 나이를 망각하고 괜한 객기부리지 말기를….
김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