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층의 탈세, 서민의 허탈감
이번호 특집 ‘떼돈! 집으로…’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은 분명 자유민주국가다.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 세금까지 납부했다면 소득의 많고 적음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변호사, 의사부부가 월간소득이 아니라 연간소득을 825만원이라고 신고하고는 아파트를 16채나 보유했다면 말문이 막힐 일이다. 도대체 세무관련 공무원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월급쟁이들은 유리알처럼 들여다보면서 개인 소득자에 대해선 이렇게 무지하다니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국가의 공복들이라 보기 어렵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공부 좀 하고, 국내서 안 된다면 선진국에 가서라도 배워 시민들의 허탈감을 메워주길 바란다. 아울러 탈세자에 대해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일벌백계하길 바라며, 이와 관련된 공무원에겐 국민이 납득할 만한 처벌이 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법에 문제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개정 내지 제정해야 할 것이다.
이종철/ 서울시 구로구 오류1동 정치인의 개인적 도덕성에 대해 이번호 논단 ‘정치인의 덕목’에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글이 이회창 후보가 자신과 가족에 대한 비난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앞세우기보다 민주헌정질서의 비천함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요지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덕목이 구분될 수 있고 더구나 경우에 따라 전자가 후자에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정치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민주헌정질서의 악폐들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 정치적 덕성은 개인적 인품에 좀 흠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논리는 나를 섬뜩하게 한다. 이회창 후보가 말하는 정의가 소수를 위한 편협한 것이라는 것은 논외로 하자. 개인의 인품이라는 것이 정치적 자장이 미치지 않는 외딴 골방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 역시 정치적 영향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덕성은 구분될 수 없다. 구분이 불가능하니 양보 역시 있을 수 없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어느 누가 이회창씨의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덕성을 구분할 것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결론은 같다. 이회창 후보는 자기 입으로 내세운 법과 원칙, 정의가 자기와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김종미/ 대구시 북구 복현2동
김남주 시인이 그립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후배들과 한국 현대사를 함께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사건들을 하나씩 훑어내려가다가 70년대의 암울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좋을 것 같아 시 전문 가운데 일부를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시를 함께 읽어본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암울한 70년대의 상황 이외에 시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글을 <조선일보>에 기재한 이후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기에 후배들이 차라리 이 일을 모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 세상을 뒤집어놓을 듯 기세를 부린 많은 이들이 보수정치권으로 진출해 자신의 과거 경험을 훈장인 양 드러내며 사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가 그러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면서 도와준 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지지해준 이들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사회적 파장도 없었겠죠. 정말로 김남주 시인이 그리워집니다. 광주 망월동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묘비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싶습니다. “온 몸을 불 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
미/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암담한 지방의 교육현실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주부 겸 직장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인구 수가 작은 읍내입니다. 20여년 전 제가 학교에 다녔을 적엔 학생수가 많아 한 학년에 8학급 정도였고, 콩나물 시루처럼 꽉 찬 교실에서 공부하곤 했는데 요즘은 두 학급이 될까 말까 하고 폐교되는 학교도 해마다 경쟁하듯 늘어나고 있습니다. 읍이나 면 단위 지역을 둘러보면 아이들이나 젊은 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고, 대부분의 노년층들이 이 지역을 힘들게 지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유는 더 낳은 교육환경을 좇아서 대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 때문이죠. 훌륭한 자녀로 키우 위한 부모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며 또한 당연한 욕심이기도 하지요. 저 역시 대도시로 이주할까 하는 심한 갈등을 겪곤 합니다. 인구 수가 적다 보니 교육적인 환경이 대도시보다 뚜렷이 떨어져 있는 현실과 그렇다고 훌훌 떨쳐버리고 대도시를 향해 떠날 수 있는 형편도 안 되기에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직까지는 현 사회가 학연을 우선순위로 꼽고 있으니까요. 가진 자만이 좋은 교육을 받고 가진 자만이 영원한 부를 추구하는 불공평한 사회에서 누구나 공평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님의 지역할당제 도입을 찬성하며 지역할당제가 빠른 시일 안에 정착해 올바른 교육문화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선옥/ 전북 순창군 인계면 <독자만화>
이종철/ 서울시 구로구 오류1동 정치인의 개인적 도덕성에 대해 이번호 논단 ‘정치인의 덕목’에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글이 이회창 후보가 자신과 가족에 대한 비난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앞세우기보다 민주헌정질서의 비천함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요지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덕목이 구분될 수 있고 더구나 경우에 따라 전자가 후자에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정치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민주헌정질서의 악폐들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 정치적 덕성은 개인적 인품에 좀 흠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논리는 나를 섬뜩하게 한다. 이회창 후보가 말하는 정의가 소수를 위한 편협한 것이라는 것은 논외로 하자. 개인의 인품이라는 것이 정치적 자장이 미치지 않는 외딴 골방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 역시 정치적 영향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덕성은 구분될 수 없다. 구분이 불가능하니 양보 역시 있을 수 없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어느 누가 이회창씨의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덕성을 구분할 것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결론은 같다. 이회창 후보는 자기 입으로 내세운 법과 원칙, 정의가 자기와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김종미/ 대구시 북구 복현2동
김남주 시인이 그립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후배들과 한국 현대사를 함께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사건들을 하나씩 훑어내려가다가 70년대의 암울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좋을 것 같아 시 전문 가운데 일부를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시를 함께 읽어본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암울한 70년대의 상황 이외에 시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글을 <조선일보>에 기재한 이후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기에 후배들이 차라리 이 일을 모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 세상을 뒤집어놓을 듯 기세를 부린 많은 이들이 보수정치권으로 진출해 자신의 과거 경험을 훈장인 양 드러내며 사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가 그러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면서 도와준 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지지해준 이들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사회적 파장도 없었겠죠. 정말로 김남주 시인이 그리워집니다. 광주 망월동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묘비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싶습니다. “온 몸을 불 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
미/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암담한 지방의 교육현실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주부 겸 직장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인구 수가 작은 읍내입니다. 20여년 전 제가 학교에 다녔을 적엔 학생수가 많아 한 학년에 8학급 정도였고, 콩나물 시루처럼 꽉 찬 교실에서 공부하곤 했는데 요즘은 두 학급이 될까 말까 하고 폐교되는 학교도 해마다 경쟁하듯 늘어나고 있습니다. 읍이나 면 단위 지역을 둘러보면 아이들이나 젊은 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고, 대부분의 노년층들이 이 지역을 힘들게 지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유는 더 낳은 교육환경을 좇아서 대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 때문이죠. 훌륭한 자녀로 키우 위한 부모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며 또한 당연한 욕심이기도 하지요. 저 역시 대도시로 이주할까 하는 심한 갈등을 겪곤 합니다. 인구 수가 적다 보니 교육적인 환경이 대도시보다 뚜렷이 떨어져 있는 현실과 그렇다고 훌훌 떨쳐버리고 대도시를 향해 떠날 수 있는 형편도 안 되기에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직까지는 현 사회가 학연을 우선순위로 꼽고 있으니까요. 가진 자만이 좋은 교육을 받고 가진 자만이 영원한 부를 추구하는 불공평한 사회에서 누구나 공평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님의 지역할당제 도입을 찬성하며 지역할당제가 빠른 시일 안에 정착해 올바른 교육문화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선옥/ 전북 순창군 인계면 <독자만화>

이성열 ddiry@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