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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커피 쏟을뻔한 시댁과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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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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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괴담 5)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아가, 배도 부른데 내려오겠느냐?”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시어머니의 나지막한 말은 내 의견을 물었지만, 정작 듣고 있는 나한테는 그게 아니었다. ‘임신 7개월인 줄은 알지만 한번 내려오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에서 시어머니한테 대놓고 ‘NO’라고 할 수 있는 며느리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결혼 4년째, 애 낳고 기르다 보니 여름휴가를 구경도 못해 본 나였다. 그만큼 잔뜩 별러온 휴가인데 시댁에서 걸려온 전화 이후 휴가는 시댁식구들과의 ‘불편한 동행’으로 바뀌었다. 시댁에 내려간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댁어른은 물론 큰시숙에 시누이, 게다가 큰아들 내외를 동반한 시댁 숙부·숙모까지 따라나서는 게 아닌가. 그렇게 시댁식구들이 총출동한 여름휴가 장소는 지리산.

“얼마 만에 가는 여름휴가인데, 시댁식구들 뒤치다꺼리하다 날 새겠군.” 속으로 툴툴거리는 새 우리는 지리산 기슭에 있는 한 민가에 도착했다. 울적한 심사를 달래주려는 것인지, 도착한 다음날부터 산에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여름빛이 짙어가는 지리산은 자욱한 물안개에 싸여 신비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편과 시댁식구들은 내가 한가롭게 지리산의 풍광에 취해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폭우가 잠깐 잦아들라치면 이때를 틈타 13명의 우리 일행은 무슨 게릴라처럼 지리산 일대를 쏘다니기 바빴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도 세살배기 딸을 안고 덩달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팔불사에서부터 차량은 진입을 못한다는 쌍계사까지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배를 이끌고 당도한 쌍계사 앞에서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지치기도 했지만 사실은 눈앞의 광경 때문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도착한 쌍계사에 차량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당신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거짓정보를 전해들은 바람에 우리를 걷게 한 남편한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남편하고 둘이 있었으면 분명 대판 싸웠을 테지만 시댁식구들 앞에서 속으로 원망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기나긴 행군에 뱃속의 아기도 지친 듯 거칠게 움직였고, 그런 느낌이 선명해질수록 속이 메슥거렸다. 간간이 뿌리는 비에 몸은 이미 온통 젖어 있었다.

여름휴가인지, 산악훈련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쉴새없이 쏘다닌 시댁식구들은 산장에 귀환하자마자 초죽음상태가 되었다. 남편도 금방 곯아떨어졌고, 칭얼대던 세살배기 딸도 어느새 졸고 있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렇게 산속의 여름밤이 깊어갈 무렵, 그제서야 나는 조용히 휴가를 즐길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그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한밤중에 불쑥 변비가 도지고 말았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화장실은 깊어가는 여름밤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다. 화장실에 난 쪽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솔바람 소리와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그렇게 싱그러울 수 없었다. 그런 상념에 빠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가, 괜찮냐?” 초저녁잠에서 깨어난 시어머니였다.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자상하게 묻는 시어머니의 말이 한 줄기 산바람처럼 푸근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며느리와 함께 보낸 여름휴가가 즐거웠는지 시아버지가 불쑥 한마디 던졌다. “며늘아, 우리 삼년에 한번씩만 이렇게 모이자!” 나는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김정란/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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